내가 만든 흔적에서 또 다른 흔적을 발견했다.

‘고블린 것은 아냐. 인간이 확실하다.’

확신할 수 있는 건 수풀이 거칠게 잘린 단면. 이곳에 서식하는 고블린들은 이렇게 마구잡이로 수풀을 헤치지 않았다. 이곳에 처음 와본 사람들, 그러니까 경계하면서 걷는 사람들만 이렇게 해치고 다녔다.

어쩌다 이 길을 지나간 사람도 아니었다. 내가 만든 흔적을 여러 번 뒤쫓던 게 발견됐다.

‘좋아. 쫓아오는 건 알겠어. 이제 몇 명이고, 어떤 목적인지만 확인하면 돼.’

아직 시간도 늦지 않았고, 일행이 있는 동굴과도 제법 거리가 멀었다. 놈들이 바로 쫓아오지 못할 거라 확신한 나는 다른 조를 뒤쫓았다.

잠시 후, 나는 내 조를 추적하는 일행을 발견했다.

인원은 총 여덟 명. 그중 한 명은 태윤 아저씨였다.

‘잠깐만. 여덟 명이라고?’

뭔가 상황이 재밌어질 예감이 들었다. 처음에 말했듯이 이 숲은 무조건 다섯 명이 한 조가 됐다. 그런데 여덟 명이라는 건 태윤 아저씨를 빼도 이미 두 조가 합쳐졌다는 말이었다.

정말이지, 과거에서도 느꼈지만 아무래도 난.

‘이 숲에선 운이 참 좋은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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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똥철아. 우리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 거 맞냐?”

“맞습니다, 형님. 저 못 믿으십니까?”

“아니. 그건 아닌데. 그냥 좀 찝찝해서 그래. 이놈의 비는 어떻게 매일 같이 퍼붓는 거냐?”

“저도 그게 정말로 궁금합니다, 형님.”

대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흉측한 얼굴에 남들보다 배 이상 큰 덩치. 남자는 한눈에 봐도 평범한 일상을 살아온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상의를 탈의한 몸에는 문신이 빼곡했고, 온몸이 단단한 근육으로 덮여 있었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잘 곳 먼저 찾자.”

“안 그래도 그렇게 하려고 했습니다. 헤헤.”

“그래. 수고 좀 해라.”

남자가 똥철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생존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보였다. 똥철이 선두에 서고, 그 뒤로 일곱 명이 걸었다.

“저, 저희 식량이 필요하지 않나요…?”

“엉? 아저씨,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태윤 아저씨의 말에 대장이 말했다.

“이 빌어먹을 숲에서 먹을 게 어딨어.”

“열매가 있잖아요.”

“그거 다 땅바닥에 구르던 건데. 거지새끼도 아니고 그걸 먹고 싶어?”

“아, 아뇨. 그럼 그거 말고 다른 먹을게…”

“우리는 괴물 놈들을 먹을 거야.”

“…네?”

태윤 아저씨는 깜짝 놀랐다.

“제가 아는 그… 푸른색의 괴물들을 말하는 거 맞나요?”

“어. 도대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남은 거야? 여기 숲에는 그 푸른 놈들밖에 없어. 사슴이나 멧돼지는커녕 날파리 하나 없다고.”

남자가 투덜거렸다.

“정말이지 빌어먹을 곳이야. 먹을 게 괴물밖에 없다니. 그래도 구워서 먹으니까 나름 먹을만하지 않았냐?”

“맞습니다, 형님.”

“아무리 그래도…”

“왜, 그 녀석들이 사람 같이 생겨서?”

대장이 웃었다.

“이봐, 아저씨. 우리는 여기서 일주일을 살아야 해. 밖은 날씨도 춥고, 비도 억수로 내리고. 그렇다고 동굴에 처박혀 있자니 그 괴물 놈들이 계속 튀어나오고. 우리도 가능하면 그런 푸른 괴물들을 먹고 싶지 않아. 그것밖에 먹을 게 없으니까 먹는 거지.”

나는 그 말을 이해했다. 우리 조는 내가 처음에 저런 괴물을 어떻게 먹냐고 해서 안 먹었을 뿐이지, 보통 다른 조는 여기서 고블린을 먹었다.

‘우리 조도 이대로 가면 내일쯤 먹겠지.’

너무 배고프면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했다. 살기 위해서. 참고로 고블린을 먹는다는 건, 지구의 표현을 빌리자면 원숭이를 먹는 것과 같았다. 끔찍할 수밖에 없다. 내가 다시는 먹지 않을 이유이기도 하고.

그때, 선두에 있던 남자가 걸음을 멈추자 뒤따르던 일행도 따라 멈췄다.

“무슨 일이야?”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지금까지 쫓던 일행의 흔적으로 보이는데… 어떻게 할까요, 형님?”

“네가 생각하기엔 어때. 한두 시간 내로 쫓을 수 있을 것 같아?”

“거기까지는 저도 잘…”

“됐다, 그럼. 걔네도 지금은 쉴 거 아니야. 그렇지, 아저씨?”

“어… 그, 그렇겠지요?”

“우리도 그럼 쉬어야지. 흔적은 내일 또 찾으면 되니까, 일단 잘 곳부터 찾자.”

“네, 형님.”

일행이 다시 움직였다.

“그나저나 아저씨. 얘기는 확실한 거겠지?”

“어떤 걸 말씀하는지…”

“여자 말이야, 여자. 여대생 한 명 있다고 했잖아.”

흐음. 그렇게 된 건가.

나무 뒤에 숨어서 얘기를 듣고 있던 나는 그제야 어떤 상황인지 깨달았다.

‘우리를 팔았나.’

의도한 것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무슨 이유로 일행과 떨어졌는지 물어봤을 때, 의도치 않게 일행에 대한 정보를 말했을 게 분명했다.

인연이 있던 사람을 쉽게 팔 정도로 인성이 덜된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예… 한 명 있는데…”

“꼬마 한 명. 그리고 남자 한 명. 이렇게 셋. 아이는 아파서 쓰러졌고, 여자 쪽도 몸 상태가 좋지 않다. 아저씨가 나한테 해준 말이잖아.”

“마, 맞습니다…”

“여자 얼굴은 어때. 예뻐? 아니면 별로야?”

아저씨가 대답하지 않자 남자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봐, 아저씨. 우리가 아저씨를 왜 받아줬겠어. 어? 우리를 봐봐. 저기 똥철이 빼고 다 한가락 하는 놈으로 보이잖아.”

확실히. 선두에 선 남자만 조금 마르고, 나머지는 전부 다 체격이 좋았다.

“우리는 말이야. 아저씨가 필요 없어. 여기 배불뚝이 아저씨보다 못 싸우는 놈이 있는 것 같아? 그렇다고 우리 똥철이처럼 뭔가 색다른 재주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아저씨를 데리고 다닐 필요가 전~혀 없다 이거지.”

남자는 태윤 아저씨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저씨도 살고 싶지? 이런 곳에서 죽고 싶지는 않잖아. 여기가 어딘지는 나도 모르지만, 왔으니까 다시 돌아갈 수도 있을 거 아니야. 그때까지 잘 살아 있어야지. 안 그래? 거, 아내도 있다면서.”

남자가 다시 한번 웃었다.

“그러니까 우리, 서로 윈윈 하자는 거지. 아저씨는 정보를 주고, 나는 아저씨를 살려주고. 이것만큼 이상적인 거래가 어디 있어?”

“…그 일행을 만나면, 무엇을 할 생각입니까…?”

“몰라서 물어? 아저씨. 알만한 사람끼리 왜 이래. 인생 뭐 얼마나 순진하게 살았다고.”

대장은 어이없다는 식으로 말을 이었다.

“아이는 필요 없으니까 죽이고. 아, 우리가 죽이지는 않아. 그냥 버려두면 알아서 죽겠지, 뭐. 여자는 우리랑 찐~하게 노는 거지. 우리 일행을 봐봐. 건강한 성인 남자만 일곱 명이야. 여자가 고프다고. 안 그러냐, 애들아?”

“맞습니다, 형님.”

다른 사람들이 맞장구를 쳤다.

“원래 우리 일행도 여자가 있었거든. 한 명. 직장인이라던데, 와씨. 존나 꼴리게 생기는 몸매에 얼굴도 이쁘장하게 생긴 거야.”

대장이 옆에 있던 일행에게 물었다.

“니들은 어땠냐?”

“살면서 만나본 여자 중에서 제일 예뻤던 것 같습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아무튼, 눈에 띄는 미녀다 보니 처음에는 나도 조금 신사답게 행동하려고 했단 말이야. 그런데 그년이 지 예쁜 걸 아는지, 겁나 싸가지가 없더라고.”

남자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래서 뭐, 깔끔하게 넷이서 덮쳤지. 와. 정말 기분이 끝내 주더라니까? 그 싸가지없는 년이, 밤새 뒹굴면서 놀아주니까 울면서 실성하더라고. 제발 그만하라고 말이야.”

“…그 사람은 어떻게 됐습니까?”

“아, 그게 말이지.”

남자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자살했어. 동굴 벽에 머리를 부딪쳐서. 독한 년이지. 우리가 밧줄이 있어, 뭐가 있어. 묶어둘 수도 없고 그냥 못 도망치게 보고만 있었는데, 그대로 벽에 머리를 박고 죽은 거야.”

나는 그 말에 당시 상황을 한 번 상상해보았다.

네 명에게 둘러싸여 강간당하고, 그 치욕을 견디다 못해 자살한 여자. 스스로 동굴 벽에 머리를 부딪칠 때까지 수도 없이 고민했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죽어야 하나, 이런 곳에서 삶을 포기해야 하나 등.

‘멍청하네.’

그녀가 무슨 경험을 했는지, 어떤 치욕을 느꼈는지 솔직히 말해 일도 관심이 없었다. 딱 하나. 그녀의 각오가 부족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나라면 끝까지 복수할 텐데.’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다 죽인다. 그런 각오가 없으니 자살 같은 걸 하는 것이다.

‘단순히 지금 내 고통이 끝나기를 바라는 거지. 손해만 보고 사는 거야. 멍청하게. 자기한테 고통을 준 사람 전부 똑같은 고통을 느끼게 해줘야지.’

그게 쉽지 않다는 것은 안다. 그렇지만 그런 각오도 없다면, 차라리 여기서 깔끔하게 퇴장하는 게 나았다. 이곳은 시작의 숲. 우리가 갈 세계가 이곳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남자의 말을 계속 들었다.

“똥철이네는 그다음에 만난 거야. 이 새끼들이 제일 병신이라니까? 뭐라 그랬더라. 계집애 하나 제압 못 해 한 명 죽었다면서?”

“아, 형님. 형님 쪽 애도 독한 것 같지만, 우리 쪽 년도 심했어요. 와, 어찌나 발광하던지. 거기다 무기도 들고 있으니까 쉽게 제압이 안 됐어요.”

“그러니까 병신인 거지. 그년 제압한다고 한 명 죽고, 그년도 죽었다면서. 도대체 어떻게 싸운 거야?”

“말도 마십시오. 아주 그냥 죽을 때까지 검을 휘두르더라니까요?”

걔는 좀 낫네. 나는 거기까지 듣고 자리에서 벗어났다.

‘상황은 알겠다.’

두 조가 합쳐졌다. 한 조는 남자 넷. 다른 한 조는 남자 셋. 합치면 일곱. 태윤 아저씨를 포함하면 총 여덟 명이었다.

고블린을 먹고 있어 체력이 부족할 일도 없고, 생존 교육을 받은 사람도 있어 쉴 곳도 잘 찾은 모양이었다.

거기다 죄책감을 크게 느끼지 않은 걸 보면 지구에서도 범죄 쪽에 가담했을 가능성이 컸다.

‘아니면 저 대장한테 휩쓸렸거나.’

어쩔 수 없이 행동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은 분위기에 휩쓸리니까. 혹은 단순히 저 남자가 무서워서 그랬을 수도 있고.

뭐가 됐든 하나는 확실했다. 정말이지 난.

‘운이 좋아.’

다섯 명을 예상했다. 태윤 아저씨를 발견한 일행이 아저씨를 살려둘 이유가 없으니까. 우리를 쫓고 있는 이유가 우리의 것을 빼앗으려고 오는 건데, 한 명이라도 더 죽어야 돌아오는 몫이 클 것 아닌가.

그런데 저놈들은 아저씨까지 살려두고 있었다. 아마 우리 일행을 발견했을 때, 아저씨를 먼저 내세우려는 속셈이겠지. 자기들 일행을 합류시키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아니면 나를 무장해제 시키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어느 쪽이든 쓸만하다는 판단하에 살려두고 있는 것이다.

‘여덟 개. 여덟 개라…’

이 정도면 케르피아에 가서 당분간 돈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최소 레어 이상의 아이템 여덟 개면 그 값이 어마어마할 테니까.

‘성대하게 환영해줄게, 친구들.’

멀리서 웃고 떠드는 남자들을 보면서 나도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