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다는 느낌이 뭘까.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다 보니 잘 모르겠다.

의식이 사라졌다. 의식이 돌아왔다. 나는 이제 인간이 아닌가?

눈을 떠야 하는데, 눈을 뜨기가 무서웠다. 그게 우스웠다. 두려움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던 내가, 가장 악명높은 암살자 길드에 들어갔던 내가. 죽음 앞에서 몸을 떨었다.

‘생소한 느낌이네.’

눈을 뜨면 이제 미지의 세계가 보이겠지. 기대되지는 않았다. 악마들이 환영하는 지옥이라. 그딴 걸 기대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너무 많은 사람을 죽였다. 천국에 갈 생각 따위는 하지도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천국에 가면 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았다.

나 같은 놈이 천국을 가면 그 빌어먹을 영웅들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거니까.

내가 고통받는 건 상관없었다. 내가 고통받아서 다른 영웅들도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나는 더한 고통도 겪을 수 있었다.

10년 가까이 복수를 위해 살았다. 이제는 복수 말고 다른 감정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너무 무뎌졌으니까. 그래도 난 만족했다.

목표가 있었다. 복수. 그것을 이루었다. 암살자로서 내 이야기는 거기서 끝났다.

‘눈을 뜨자, 성민아. 눈을 뜨는 거야.’

그리운 이름이다. 내 원래 이름. 하도 오랜만이라 그런지 어색했다. 나 자신의 용기를 북돋아 주는 건 더욱 어색했다. 후자는 살면서 해본 적이 손꼽았고, 전자는 벌써 5년도 더 넘는 일이었다.

그동안 나는 핑크 마리스의 46호 암살자로 불렸지, 따로 이름으로 불리진 않았다.

“어~이. 대체 언제까지 자고 있을 거야?”

뭐야. 악마의 목소리치고는 꽤 상큼하잖아. 악마라는 이미지가 워낙 무시무시하다 보니 당연히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일 줄 알았다. 그것도 아니면 끔찍한 목소리라던가, 대마왕처럼 오싹한 목소리라던가. 그런 걸 기대했는데 내 생각과는 많이 달랐다.

“하아. 알아. 다 안다고. 갑자기 뚝 떨어져서 놀랬지? 자자. 그래도 이렇게 계속 누워있으면 너만 손해에요, 손해. 그러니까 내가 도와줄 때 빨리 일어나는 게 좋을 거야.”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였다. 어디서 들어봤더라. 꽤 자주 듣던 목소리인데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게 이상했다. 내가 받은 훈련 중에는 기억을 완벽하게 떠올리는 훈련도 있었다. 정보가 생명인 암살자 길드에서는 모든 정보를 원했고, 우리 암살자들은 그에 맞게 훈련을 받았었다.

현장에서 모든 걸 바로 기록하면 편하겠지만, 사람의 한계로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 암살자들은 모든 정보를 머릿속에 암기했다.

하나도 까먹지 않고, 그대로 적기 위해서. 이건 꼭 머리가 좋지 않아도 가능한 일이었다. 제대로 그 상황을 봤다면 내 머릿속에 모든 정보가 있을 테니까. 나는 그저 그걸 꺼내기만 하면 된다.

지금 생각해보니까 정말 별의별 훈련을 다 받았구나 싶다.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내가 기억에 혼란을 가진다는 게 문제였다.

‘죽어서 그런가?’

그럼 곤란한데. 내가 만났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도 못 알아볼 수 있다는 거잖아. 나는 걱정 아닌 걱정을 하면서 각오를 다졌다.

이 이상 눈을 감는다고 상황이 나아지지는 않아 보였다. 이 상황을 해결하려면 결국 눈을 떠야 했다.

좋아, 침착하게. 각오를 다시 한번 다지고. 마음의 준비를 끝마친 나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

새하얀 방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방. 그곳에 내가 누워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아, 드디어 일어났네? 좋아, 좋아! 좀 늦었지만 뭐, 처음이니까! 지금은 이렇게 봐주지만, 다음에 또 이러면 용서하지 않을 거야! 아 물론 내가 용서를 안 한다는 게 아니라, 네가 앞으로 떨어질 세계가…”

키는 1미터 정도. 등에 작은 천사 날개가 있는 것을 빼면 평범한 남자아이로 보였다.

나는 이 녀석을 알고 있다.

“…아아. 뭐 대충 이렇고. 참! 그러고 보니 내 소개를 아직 안 했지? 내 이름은 ─”

‘피린.’

“─피린이야! 잘 부탁해!”

귀여운 꼬마 천사가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다음으로는 네 소개를 들을 수 있을까?”

그 말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피린을 쳐다보기만 했다.

‘꿈인가?’

왜 이 목소리가 바로 생각나지 않았는지를 알겠다. 이건 내가 ‘의도적으로 지운 기억’이었다.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려고 나 스스로 기억을 절단했다.

분명 피린을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나는 이 녀석을 울렸다.

-너… 이대로 나가서, 그 길을 걸으면… 두 번 다시 나랑 만날 수 없어…

-잘하라고 하지 않을게… 열심히 살라고도 하지 않을게… 그냥… 그냥…

-잘 있어, 피린.

암살자가 되기 전, 나는 이 녀석을 만났었다. 하도 만나 달라, 만나 달라 사정을 해서 만났었고, 녀석이 한 말은 역시나 내가 예상한 대로였다. 울 줄은 몰랐지만.

그게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이었으니까 오래되기도 했다.

문제는.

‘어째서, 꿈에서 이 녀석이 보이는 거지?’

혹시 그런 건가. 죽기 직전에 보인다는 주마등 같은 거.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그런 날 보고 녀석은 다르게 해석한 모양이었다.

“음… 아직 정신이 제대로 안 돌아왔나 보네… 어쩔 수 없지. 자자, 긴장 풀고. 침착하게. 알아. 다 안다고. 지금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정신이 하나도 없을 거야. 그래서 분위기를 좀 편하게 하려고 말한 건데, 별 효과가 없었나 보네.”

피린은 과하게 팔을 휘두르면서 말했다.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려고 하는 모양인데, 불그스름한 뺨과 올라간 입꼬리가 영락없이 기쁜 표정이었다. 얘는 대체 뭐가 그렇게 기뻐서 저러는 건지.

“사실 네 정보는 이미 다 알고 있거든! 네가 좀 진정하라는 뜻에서 물어본 건데, 반응이 없으니 내가 천천히 말할게. 잘 떠올려봐!”

뾰로롱. 귀여운 소리와 함께 피린의 앞에 거대한 문서가 하나 나타났다.

“자. 이름 강성민. 나이 26. 직업은 백수. 특이사항으로는… 호오. 군대를 다녀왔구나? 좋아, 아주 좋아! 잘 싸우겠구나!”

“…으응? 2년? 이렇게 짧게 다닐 수도 있나? 뭐 아무튼, 그것 외에는 딱히 없네. 최종 학력은 대학 졸업. 머리가 좋았나 봐? 몸도 별다른 아픈 구석이 없고. 건강한 게 좋지. 암.”

“취미는 컴퓨터 게임. 앗, 나 이거 알아! 나도 인간들에 대해 공부하면서 이거 해봤거든! 무슨 게임을 했어? 나는 ‘마법사의 협곡’이 제일 재밌드라! 그중에서도…”

얘는 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걸까. 처음에는 내 정보를 말해주는 것 같더니, 갑자기 지 혼자 게임 얘기에 삼매경이었다. 아니, 그것보다…

‘너무 시끄럽잖아.’

원래 말이 좀 많은 녀석이었다. 솔직히 내가 대화하는 걸 싫어하는 타입도 아니고, 재미있는 주제라면 말하는 걸 좋아하기도 한다만. 이 녀석은 그냥 말이 너무 많았었다.

그래서 나는 가끔 이 녀석을 보고 혹시 생전에 말 못 하고 죽기라도 했냐 라고 물어본 적도 있었다.

“…그리고 있지, 내 최애캐는 ‘타모’야! 걸을 때마다 얼마나 귀엽고 깜찍하게 걷는지! 또또, 버섯을 심는 게 자연 친화적에다가 능력치도 아주 준수해! 역시 타모가 최고라니까!”

거기까지 얘기했을 때쯤, 녀석은 날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음… 취미가 컴퓨터 게임이라고 해서 이런 쪽을 얘기하면 반응이 좀 있을 줄 알았는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것 같네. ‘차원 도약’ 후유증이 생각보다 많이 컸나?”

“그런 거 아니다.”

“엇, 그래? 이제야 반응해 주는구나! 좋아, 아주 좋아!”

“그전에, 여긴 어디지?”

더 얘기하게 놔두면 끝이 없을 것 같아 나는 중간에 말을 끊었다.

‘지옥 가는 중간 장소? 주마등으로 볼 수 있는 풍경? 꿈? 환상? 뭐지?’

내가 예상한 대답이 쭉 있었는데, 피린은 내가 생각지도 못한 답을 꺼냈다.

“역시 그게 궁금하구나. 어… 그러려면 우선 네가 여기 왜 떨어졌는지에 대해서부터 설명해야 하는데. 그래도 궁금한 걸 물어봤으니 그거 먼저 대답해줄게. 여기는 ‘셀레브리엄’. 자세하게 들어가면 굉장히 복잡하니까, 쉽게 설명하자면 우주 구석에 있는 작은 공간이야. 더 정확히 말하면 차원과 차원 사이의 공간인데… 아직 인간들의 지식으로는 모른다고 하니까, 간단히 말하면 여긴 휴식처야. 응. 그렇게 생각하면 편해.”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여기가 어딘지는 당연히 아는 정보였고, 중요한 건 왜 지금 이 장소에 떨어졌냐는 것이다.

“내 말은 어째서 내가 이곳에 떨어졌나, 그게 궁금한 거다.”

그 말에 피린의 표정이 바뀌었다. 어울리지 않게 갑자기 근엄한 표정을 짓더니, 사방에서 눈부신 빛을 번쩍이며 큰소리로 외쳤다.

“에헴! 에헴! 인간 강성민은 들어라! 너는 우리 천족들에게 선택받은! 고귀한 자로 임명됐다! 지금부터 너는 지구가 아닌 다른 세계로 떨어지고, 그곳에서 하나의 ‘목표’를 찾을 것이다!”

“그 목표를 찾으면! 우리들의 절대자이자 창조주이신 신의 이름을 걸고!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리라!”

그 말을 끝으로 다시 표정이 바뀌었다.

“…뭐, 대충 이런 설정이야. 원래는 좀 더 멋있게 말해야 하는 건데, 나 참.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정말이지 대부분의 천사는 바보라니까? 이런 건 멋있게 말한다고 되는 게 아닌데! ‘인간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나로서는 멍청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어!”

아, 그러냐?

“갑자기 느닷없이 다른 환경에 떨어졌는데, 선택받았다니 뭐니 하면서 그러면 인간들이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지금부터 괴물들을 잡고, 마왕의 모가지도 따서 천사들께 바치겠습니다! 이러는 줄 아나 봐! 이게 다 그 바보들이 영화나 만화로만 인간을 접해서야!”

잔뜩 흥분한 피린은 내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너는 내 파트너야! 그렇게 얼렁뚱땅 얘기하고 싶지 않아!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 같으니까, 일단 좀 차분해지면…”

아, 저 녀석 또 혼자 이야기 삼매경에 빠지네. 나는 피린의 말을 적당히 흘려들으면서 추억에 잠겼다.

예전에도 자주 이랬었다. 녀석이 뭔가 말을 막 하면, 나는 대충 들으면서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었다. 그래. 익숙한 추억이 재현되고 있었다.

…그리운데.

‘그립다고?’

나는 정신을 차렸다. 그립다니, 그런 나약한 감정을 품다니.

‘죽어서인지 쓸데없는 감정 소비가 늘어났군.’

아무래도 죽음이 내 정신에 크나큰 영향을 준 것 같았다. 암살자가 되고 난 이후, 나는 내 모든 감정을 완벽하게 조종했다. 그리움만이 아니라 사랑, 공포, 즐거움, 절망… 그 모든 감정을 오로지 복수 하나로 탈바꿈했다.

‘나는 암살자다.’

그 말을 중얼거리면서 나는 내 감정을 정리했다. 새로 피어난 감정을 빠르게 지우고, 다시 피린을 쳐다보았다.

내 기억과 변함없는 아기 얼굴. 환하게 웃는 미소. 포근한 감정이 느껴지는 천사의 분위기.

다시는 느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분위기를 느끼자… 기분이 묘했다. 아주 묘했다.

‘끙.’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은 이 장단에 조금 맞춰볼까.

“그래서, 여기 다음은 지옥이냐?”

“응? 음… 지옥. 아니야. 어, 물론 다른 세계로 간다는 점에서 지옥과 비슷하다고는 볼 수 있는데… 너희 인간들이 말하는 지옥의 개념은 사후세계잖아? 앞으로 갈 세계는 사후세계가 아냐. 넌 죽은 게 아닌걸.”

“…내가 죽지 않았다고?”

“응. 넌 죽은 게 아니야. 잘 떠올려봐. 여기 오기 전에 뭐 했는지.”

뭐하긴. 대마왕 가르바논의 죽음을 보고, 영웅들의 빈틈을 헤집고 다녔지. 그 후 아이템을 손에 넣고…

“기억이 잘 나지 않은 것 같으니까 내가 친절하게 알려줄게. 어젯밤에 넌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셨어. 동네 치킨집에서. 그리고 집에 와서 뻗었지. 그 후 여기로 불려온 거야.”

피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인간들이란. 백해무익한 음료를 왜 그렇게 마시는 건지. 뭐, 아무튼 그걸 마시고 자서 지금 정신이 좀 덜 깼을 거야. 천천히 잘 생각해봐.”

“…어젯밤에 내가 술을 마시고 잤다고?”

“응. 내가 직접 본 건 아니지만, 여기 이 기록은 절대 틀리지 않거든.”

피린은 손에 들고 있던 종이 쪼가리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이건 네 정보를 모두 기록한 문서야. 아까 말했던 네 신상 정보부터 시작해 네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다 기록되어 있지. 쉽게 말해 ‘강성민’이라는 인간을 문서화한 거야. 대단하지?”

피린은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네가 셀레브리엄으로 온 순간, 너라는 정보의 모든 걸 이 문서가 기록해. 여기 시스템이 그렇다는 거지. 참고로 말하자면, 이 시스템은 절대자이자 위대한 창조주이신 우리의 신께서 만들어 주신 것이니까 잘못될 수가 없어. 완벽 그 자체야!”

“정말이지 획기적인 시스템이라니까? 천사들이 굳이 인간 세계에 내려가지 않아도, 인간이 여길 들어오는 순간 모든 게 다 기록돼! 아, 물론 단점도 있지. 천사들이 더 이상 직접 인간들을 둘러보러 내려가지 않는다는 점? 그래도 이 시스템 덕에 우리는 훨씬 더 편하게…”

“어, 그래. 편하게 심판하겠지.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남과 동시에 피린의 양쪽 어깨를 붙잡았다.

“응? 갑자기 왜…”

“다시 말해봐. 내가 어젯밤에 뭘 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