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표정이 사납게 일그러져 있는 걸 봤는지, 피린은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조심스럽게 문서를 훑어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뺏어서 내가 직접 읽어보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안 그래도 일어서서 제일 먼저 확인한 게 그거였는데, 문서에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문자만 가득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흠. 너희 행성… 그러니까 지구 연도 기준, 2019년 09월 19일 오후 10시 27분 42초. 네 집과 541미터 떨어진 ‘먹자 치킨’에서 ‘생맥주 500CC’라는 음료를 4잔 마셨어. 친구 세 명과 같이 마셨고, 중간에 화장실도 한 번 갔지. 그 외에는 처음 앉은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았어. 너는 다음 날 아르바이트 때문에 더 늦지 않게 집으로 돌아갔고. 그 시간이 09월 20일 오전 00시 34분 12초. 집에 도착한 넌 씻고 바로 침대에 누웠어.”

그다음은 뭐, 여기로 불려오게 된 거야. 피린은 거기까지 말하고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네가 뭐 때문에 놀란 지 모르겠어. 이 문서, 네 모든 걸 기록하고 있어서 방금 말한 것도 내가 요약해서 말한 거야. 네가 화장실을 몇 시 몇 분에 갔으며, 치킨집에서 했던 이야기 등 모든 걸 다 기록한 문서다 보니 쓸데없는 것도 많아서 말이지. 내가 이런 것까지 다 말해줬으면 해?”

“아니. 됐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확실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이 녀석은 지금 대륙 케르피아에서 20년 동안 생활한 내 일생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잠시 상황을 정리해보자.’

우선, 이 녀석이 지금 날 속이고 있나? 바로 대답할 수 있다. 아니다. 적어도 지금까지 한 얘기 중에 거짓은 없었다. 천사라고 해도 기본적으로 얼굴형은 인간에 가까웠다.

속고, 속이는 일이 많은 암살자의 특성상 나는 사람의 얼굴을 분석할 때가 많았다. 그만큼 내 눈은 상대방의 거짓을 거의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는데, 내 눈에서 연기라고 생각되는 표정은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므로 우선 이건 패스.

다음. 피린은 내가 이 세계에 떨어지기 전, 다시 말해 20년 전의 일을 이야기했다. 이 정보 자체가 사실인지가 문제였다. 피린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 쳐도, 피린이 보는 저 문서 자체가 거짓이라면? 이게 그냥 단순히 내가 만든 환상이라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쉬웠다. 내가 기억만 하면 되니까. 그런데 사실 이 부분이 제일 곤란한 일이었는데…

‘…내가 그때 무엇을 했는지 기억할 수가 없다.’

20년이다. 자그마치 20년을 다른 세계에서 썩었다. 내가 지구에서 뭘 했는지 등등 대략적인 건 기억하나, 이곳에 오기 직전 뭘 했는지 따위는 당연히 기억에 없었다.

아무리 훈련받았다고 해도 그 정도로 오래된, 필요 없는 기억이 남아있을 정도로 난 똑똑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부분은 보류하고.

‘나는 지금 과거의 일을 되풀이하는 건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를 떠올려보았다. 당연하게도 이것 역시 기억에 없었다.

20년 전. 이곳에 느닷없이 떨어졌을 때. 나는 저 녀석 말대로 숙취 때문인지, 차원 도약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공포에 질려서인지 정신이 없었던 것만 기억한다. 사실 처음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은 정말 잠깐이고, 별 의미도 없는 시간이니 이것을 기억 못 하는 게 내 잘못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그 다음. 조금 믿기는 힘들지만… 좋아. 몇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보자. 죽음 이후에 과거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들을 얼핏 들어본 적이 있어.’

들어본 적이 있었다. 사람이 죽었을 때 어디로 가는가에 대해서. 천국, 지옥과 같은 사후세계도 있고, 환생도 있고, 윤회도 있고, 심지어 이런 것도 들었다.

과거로 돌아가서 다시 똑같은 인생을 반복한다. 물론 기억은 없고, 영원히 반복되는 삶을 산다고 한다.

‘그런데 난 지금 기억을 가지고 있잖아. 그럼 도대체 뭐지?’

짧은 시간, 수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뭐 하나 확실한 게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 모든 생각을 단번에 압축했다.

‘그런 건 이제 중요하지 않아.’

냉정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확실한 것만 짚고 넘어가자. 나는 분명 죽었다. 그래. 여기까지는 확실해. 죽고 나서, 내가 만든 환상에 들어왔다? 보류. 죽고 나서 다시 태어났다? 아냐. 태어난 게 아냐. 그랬으면 아기로 태어나야지. 회귀? 어째서 20년 전이지? 그리고 왜 나는 기억을 가지고 있는 거지?’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 그런 생각이 떠오를 때쯤, 머릿속에서 번뜩이는 게 하나 있었다. 바로 죽기 전 마지막 순간이었다.

‘그때 분명 무슨 말을 들었던 것 같은데.’

-그것이 네 …인가?

-…질 것이다.

-…‘???’ 을 사용…다.

-…소원은 …습니다.

나는 내 기억 속에 희미하게 남은 말을 떠올려 보았다.

‘소원… 소원… 죽기 직전에 한탄했었지. 그게 소원으로 취급된 건가. 그렇다면 그 아이템은… 젠장. 지구로 돌려보내주는 아이템이 아니란 말이야?’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불현듯 방금 피린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목표를 찾으면! 우리들의 절대자이자 창조주이신 신의 이름을 걸고!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리라!

“피린. 하나만 묻자.”

“으응?”

“네가 말한 목표라는 것을 찾으면,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준다고?”

“그렇지.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줄 수 있어. 이건 우리들의 절대자이자 ─”

“위대한 창조주이신 신의 약속이지. 그래. 그건 됐고. 그렇다면 지구로 돌려보내 줄 수도 있겠네?”

“으으응?”

피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물론 그것도 되지. 아, 그런데 그런 것보다 다른 게 더 탐나지 않아? 부귀영화라던가, 불멸의 삶이라던가, 한 세계의 지배자가 되고 싶다던가 등…”

나는 거기서 내가 이제껏 오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빌어먹을. 피린을 만나지 못해서 난 지금까지 그 보상이 뭔지도 모르고 있었어.’

지금 이렇게 목표에 대해 설명해 주지만, 아까 말했듯이 처음에 대한 기억은 없었다. 앞으로 살아갈 세계에서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은 목표는커녕 살아가기도 바쁜 삶을 사니까.

당연히 목표에 대해서는 희미해지고, 살아가는 게 지상 최대의 고민거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다 슬슬 강해지고 어느 정도 살만할 때쯤 영웅들은 천사들한테서 다시 한번 목표에 대해 들었겠지만, 나는 피린을 만날 수 없어 그 목표 아이템에 대한 설명을 듣지 못했다.

암살자가 됐다는 건, 그리고 영웅들의 적이 됐다는 건 쉽게 말해 정상적인 길에서 벗어났다는 얘기니까. 천사들이 만나주지 않았고, 이 세계로 떨어진 궁극적인 목표에 대해서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나를 포함한 우리 암살자들이 알고 있었던 사실은 딱 하나. 이 끔찍한 세계에서 영웅들이 목표 아이템을 얻어 지구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전후 사정을 모르는 우리는 그저 그 아이템이 지구로 돌려보내주는 물건이라고 생각했다.

사실은 그게 아니었는데.

‘어처구니가 없네.’

무엇이든 들어주는 아이템. 그게 사실이라면, 마지막 순간 내가 되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떠올리지 않고, 철저하게 영웅들을 죽여달라고 저주했으면 영웅들은 다 죽었을 거라는 얘기였다.

그때 난 멍청하게도 복수를 완료했다는 마음에 그런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다. 젠장, 젠장!

‘나는 아이템을 사용해서 소원을 이루었다. 그 소원은 과거로 돌아가는 것. 그래서 나는 지금 과거로 돌아온 것이고…’

혼란스러웠던 머리가 진정됐다. 상황이 정리되자 이제는 다른 게 눈에 들어왔다. 이 새하얀 방 한쪽에서 한층 더 밝게 빛나는 타이머. 그게 자꾸 눈에 밟혔다.

00 : 54 : 24

“저건 뭐지?”

나는 줄어들고 있는 타이머를 보고 물었다.

“아, 저건 네가 다음 장소로 이동할 때까지 남은 시간을 알려주는 타이머야. 이곳에 처음 올 때 2시간을 받았고…”

‘2시간 후에 튜토리얼 필드로 넘어가는 건가.’

내 머릿속에서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차례대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래. 정신 차리자. 상황은 이미 들이닥쳤다.’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 내 상황을 깨닫고, 앞으로의 일을 계획했다. 늘 해오던 일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정리하고, 가장 이상적인 계획을 그렸다.

‘다시 태어나던, 환생이던, 과거로 회귀했던.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내 목표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거지.’

이제 그만 쉬는 줄 알았다. 다 끝난 줄 알았으니까. 그렇지만 아무래도 쉬는 건 다음에 해야 될 것 같았다.

“자자.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것 같으니까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할게. 이제부터 남은 시간 동안 너는 앞으로 갈 세계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해. 네가 떨어질 세계는 원래 살던 지구와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나니까.”

피린은 어디서 튀어나온지 모를 두 개의 책자를 들고 내 앞에 내밀었다.

“‘생존’과 ‘전투’. 여기서 둘 중 하나를 간략하게 배우고 너는 다른 세계로 떨어질…”

나는 망설임 없이 전투라고 쓰인 책자를 집었다.

“…전투. 나쁘지 않아. 너는 특히 군대도 갔다 왔으니까 더 잘 싸우겠지? 적성에 딱 맞을…”

“그래, 그래. 알았어.”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면서 책자를 펼쳤다.

-‘전투’ 관련 연습 모드로 넘어갑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스킵 버튼을 눌렀다.

“어…?”

-전투와 관련된 기초적인 스킬을 터득했습니다.

-기본 장비를 지급받았습니다.

“야!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뭐긴 뭐야. 불필요한 걸 건너뛴 거지.

‘누가 누굴 가르친다고.’

이 세계의 최종 보스인 대마왕 가르바논까지 봤다. 물론 내가 직접 가르바논을 상대한 건 아니지만, 그 가르바논을 상대한 영웅들과는 수도 없이 싸웠다.

지금 내게 중요한 건, 어설픈 가르침을 듣는 것보다 앞으로의 계획이었다.

‘나는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알고 있다.’

앞으로 이 세계가 어떻게 바뀌는지, 어느 세력이 언제 성장하고 사라지는지 등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부터… 내가 판을 바꾼다.’

과거. 나는 영웅들에게 절망을 안겨주었지만, 딱 하나 하지 못한 게 있었다.

바로 영웅들의 죽음.

원래는 영웅들을 다 죽이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남은 암살자는 나 혼자였고, 영웅들은 모두 건재했으니까.

그래서 불가피하게 계획을 바꿨다. 놈들이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죽이고, 그게 안 되면 놈들의 희망을 뺏자고 말이다.

‘결국 난 후자를 선택했지.’

내 선택은 옳았다. 몇 번을 되돌아봐도, 그때 영웅들의 뒤를 친다고 해도 영웅들은 분명 대마왕 가르바논을 잡았을 것이다. 그리고 지구로 무사히 돌아갔겠지. 나는 옳은 선택을 했다.

‘이번에야말로 다 죽이겠다.’

20년 전. 이때는 아직 영웅들이 뜨기 전이었고, 개중에는 아직 오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나에게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피린을 내버려 두고, 나는 생각을 정리했다.

앞으로 어떻게 행동하고, 무엇을 쫓고, 해야 할 일들을 말이다.

00 : 02 : 12

‘2분 남았나.’

생각이 끝났을 때. 약 2분 정도 남은 시간을 보고 피린에게 말했다.

“다녀올게.”

“…뭐? 다녀와? 야, 이 바보야! 네가 지금 소풍 나온 줄 알아? 아무리 네가 대륙 ‘케르피아’에 바로 들어가는 건 아니라고 하지만, 지금 네가 가는 곳은 지구와 완전히 다른 곳이라고! 당장 그곳의 괴물 한 놈과 마주치기만 해도 넌 도망다니기 바쁠 거야!”

“그래, 그래.”

“자꾸 흘려듣지 말라고! 내가 지금 누굴 걱정하는 줄 알아? 너라고, 너! 이 바보, 똥개, 말미잘, 해파리… 또 뭐 있더라… 아무튼! 내가 알려준 경고는 하나도 안 듣고! 너 이대로 그냥 가면…!”

“어, 시간 됐다.”

타이머의 시간이 끝나자 내 앞에 문이 생겼다. 동시에 문이 활짝 열리며 나를 강제로 빨아들였다.

“으아아악! 이 멍청이가! 이것만 마저 듣고 가! 절대로 동료들과 떨어지지 말고, 꼭 뭉쳐 다녀! 움직일 때는 ─!”

“걱정하지 마.”

나는 문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피린에게 엄지를 척 올려 보였다.

“내가 알아서 잘 할 테니까.”

나는 핑크 마리스의 46호 암살자. 죽이고, 살아가는 일이라면 이 세계에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살인마다.

‘이런 곳에서는 안 죽지.’

영웅을 죽인다. 그 목표 하나로 세상의 끝까지 쫓아갔다.

‘회귀를 했던, 무엇이 됐던 상관없어. 복수할 대상이 있다면.’

죽이면 된다. 나는 저항하지 않고 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