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 고대인의 사유나 표상이 반영된 신성한 이야기.

이곳, 세상의 끝에서. 또 하나의 신화가 쓰여지는 순간이었다.

하늘에서는 수많은 운석이 떨어지고, 지상에서는 검은 불길이 타올랐다. 발 디딜 곳 하나 없는 이곳은 용암과 불, 독 안개가 가득 뒤덮여 이미 지옥으로 변한 지 오래였다.

사람이라면 한시도 버틸 수 없을 것 같은 이 전장에서, 놀랍게도 오십 명의 사람들이 빛을 흩날리며 서 있었다.

용사와 마왕의 이야기. 동화책에서나 볼 수 있었던 전설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하찮은 인간 놈들이! 감히!”

용사의 적. 대마왕은 이 세계의 지배자였다. 셀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전투를 이기고, 이 세계의 원래 주인이었던 천족을 몰아냈다. 과거 그 어느 마족도 이루지 못한 대업적을 이루고, 대마왕은 이 세계의 유일무이한 지배자가 되었다.

그로부터 수천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대마왕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의 옥좌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수천 년간 단련된 육체는 이미 신 그 자체였고, 세계 어디를 돌아봐도 자신보다 강한 적을 찾을 수 없었다. 무의 정점. 더 이상 적수가 없었던 대마왕은 앞으로도 영원히 이 세계의 지배자가 될 줄 알았다.

분명 그런 줄 알았는데, 대마왕은 지금 도전자들과의 전투에서 밀리고 있었다.

“나는! 대마왕 가르바논이다! 너희 같은 열등한 종족에게! 죽지 않는다!”

5미터가 넘는 거구. 기하학적인 문양이 새겨진 검은색 피부. 100센치가 넘는 거대한 뿔. 한 쌍의 검은 날개와 거대한 꼬리.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압도적인 기운은 가히 악의 화신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전부 다! 죽여버리겠다!”

한 손에는 사람 키보다 배나 큰 거검을, 다른 한 손에는 불타는 채찍을 들고 마왕은 닥치는 대로 공격했다.

“공격 중지.”

그런 무시무시한 공격을 정면에서 받은 건 한 남자였다. 판금 갑옷을 입고, 자기 키보다 큰 방패를 든 남자는 다른 인간들과 비교하면 거대한 체격을 가졌으나, 대마왕 앞에서는 한없이 작은 존재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남자는 태연한 표정으로 대마왕의 검을 받아냈다.

어른과 아이의 싸움. 그렇게 불려도 손색없는 충돌이 놀랍게도 아이의 승리로 나왔다.

대마왕의 검은 방패에 튕겨 나갔고, 남자는 흐트러짐 없이 다시 방패를 들어 올렸다.

“이놈! 내 앞에서 감히 하찮은 잔재주를!”

벌써 몇 번째 공격일까. 대마왕은 가진 마법을 모두 쏟아내고, 지옥의 힘까지 끌어내어 검을 휘둘렀다. 그런데도 눈앞의 사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크으! 이 벌레 같은 놈들! 심판을 받아라!”

불꽃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 밖에도 운석, 검은 불길, 끓어오르는 용암이 사방에서 덮쳤다. 어디서 무슨 공격이 튀어나올지 모를 이 혼란스러운 전장에서, 영웅들은 피해를 최소화하며 움직였다.

피해야 할 건 피하고, 막을 건 막고. 때로는 다 같이 움직였다가, 때로는 모두 산개했다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일시 분란하게 움직였다.

“…”

거기에는 지휘도, 명령도, 눈을 맞추는 합도 없었다. 본능적으로 자신이 움직여야 할 때, 그리고 어느 지점에 위치해야 하는지 아는 것 같았다. 여기 있는 영웅들은 오랜 시간 함께 싸웠고, 이제 이들에게 있어 대화는 더 이상 필요한 수단이 아니었으니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고, 진형이 깨지지 않는 선에서 움직였다. 여기까지 오면서 고생한 것이 헛것은 아니었는지, 영웅들은 처음 보는 공격도 능수능란하게 막았다.

“이 쥐새끼들이!”

그럴수록 대마왕은 광분하여 점점 더 빠르게 공격했다. 대마왕에게 있어 인간이란 손가락 한 방에 죽일 수 있을 정도로 하찮은 종족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이 밀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다.

“너희 같은 벌레들이! 모인다고 해서! 나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갈수록 더 흉포해지는 대마왕의 공격에도 영웅들은 투쟁심을 잃지 않았다. 체력이 줄어들고, 기력이 점점 더 쇠퇴해가도 두 눈만큼은 빛을 냈다.

“침착해라.”

대마왕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 여기 모인 오십 명의 영웅들은 최정예 용사들이었다. 전사, 마법사, 궁수, 사제 등 가지 각색한 직업들이 모였고, 모두가 다 힘을 모아 이 지옥 속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

‘여기서 끝날 수는 없다.’

마지막 한고비. 그 한고비를 남기고 죽을 수는 없었다. 영웅들은 이를 악물고 맞서 싸웠다.

막고. 회피하고. 공격하고. 싸우고, 또 싸우고. 그렇게 전투가 시작된 지 무려 3시간이 지났다. 정신력이 한계에 닿을 만큼 전투를 치렀고, 지칠 줄 모르던 영웅들도 이제는 탈진이 임박했다.

“크아아아!”

상황이 바뀐 것은 그때였다. 대마왕의 검은색 피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기하학적인 문양에서 빛이 흘러나왔다. 전보다 배나 더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자 선두에 선 남자가 물었다.

“대마왕의 남은 체력은?”

“이제 10% 안입니다. 라스트 페이즈입니다.”

“여전히 스킬은 읽을 수 없나?”

“예. 그러나 짐작은 가능합니다.”

대마왕 주변에서 타오르던 불길의 색이 변했다. 검은색에서 붉은색, 붉은색에서 노란색으로. 점점 더 하얗게 변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면 마지막 기술이 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자폭 패턴인가.”

“그뿐만이 아닙니다. 강화, 광폭 등 온갖 버프는 다 두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선두에 있던 남자가 처음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3시간이 넘는 전투. 다들 겉으로는 괜찮다는 얼굴과 몸짓을 보여주고 있지만, 사실 이미 기력이 다한 사람도 몇몇 보였다. 지금까지 실수 한번, 사고 한번 없이 무난하게 흐른 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다.

“지금부터 방어를 포기한다.”

남자는 방패를 버렸다. 상당히 충격적인 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뒤에 있던 영웅들은 반응이 없었다.

굳이 듣지 않아도 현재 상황을 알았고, 본능적으로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해결할 수 있는지 깨달은 것이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고, 더 이상 안정적으로 진행하는 건 불가능.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무조건 공격.

“간다.”

한손검을 버리고, 등에서 거대한 대검을 뽑은 채. 선두에 있던 남자는 제일 먼저 달려 나갔다. 그것을 시작으로 영웅들은 대마왕을 포위하는 진형을 갖췄다.

방어적인 진형을 포기하고, 공격적인 진형으로 변화. 더 이상 보호받지 못한다는 사실에도 영웅들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보낸 기나긴 시간 동안 단련된 자신의 몸을 믿었고, 나아가 동료들을 믿었으니까.

“하찮은 놈들! 너희들은 단 한 놈도! 살아서 나가지 못한다!”

체력이 빠르게 줄어들고, 아슬아슬하게 급소를 피해 가면서도 영웅들의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여기 모인 영웅들에게 있어 이제 생사를 오가는 전투는 익숙했기 때문이다.

전투란 전투, 전쟁이란 전쟁은 모조리 승리한 건 물론이고, 배신과 암투를 넘어 수차례 죽을 위기를 모면했다. 그런데도 살아남아서 여기까지 올라왔다.

각오 하나만 놓고 보자면, 처음부터 이 싸움의 결과는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라스트 페이즈가 시작되고 약 10분 정도 시간이 지났을 때. 모든 불길이 동시에 멎었다.

“…”

심장에 꽂힌 대검. 그것을 끝으로 대마왕의 모든 기운이 사라졌다. 자신이 끝났음을 깨달은 대마왕은 자신의 앞에 선 남자를 보고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허탈하구나. 허탈해. 이렇게 끝날 줄이야.”

이 세계에서 정상으로 군림한 지 수백, 수천 년의 시간이 지났다. 동족 중에서 자신을 넘볼 수 있는 자가 없었고, 저 간악한 천족들도 자신 앞에서는 무기력하게 쓰러졌다.

그 외 다른 열등한 종족은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했건만. 그중 하나인 인간에게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크흐흐… 이렇게 쓰러져 간다만. 나쁘지 않은 삶이었다…”

신으로 추앙받고, 최강의 자리에 올랐다. 그 누구도 이룰 수 없는 대업적을 이루고 위대한 행보를 걸었다.

대마왕 가르바논은 마지막으로 미소를 지었다.

“이제 나도… 쉴 때가 된 건가…”

그 말을 끝으로 대마왕의 몸이 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세상의 끝, 최종 보스 대마왕 ‘가르바논’이 소멸하였습니다.

-모든 메인 퀘스트를 완료하였습니다.

풍경이 변했다. 검은색이던 하늘이 하얀색으로, 지옥과도 같은 땅이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으로 변했다.

더 이상 싸울 적도, 싸울 이유도 없는 완전한 끝. 마침내, 작게는 15년, 길게는 25년이라는 긴 시간의 여정이 막을 내린 것이다.

툭!

빛을 흩날리며 사라지는 대마왕의 시체 속에서 구체 하나가 떨어져 나왔다.

그것을 보고도 영웅들은 아무런 행동을 취할 수 없었다.

“…”

그들은 여전히 두 눈으로 알람창을 주시했다. 최종 보스가 소멸했다는 말과 함께 모든 메인 퀘스트를 완료했다는 것. 그것만을 주시했다.

너무나 많은 일이 있었다. 끝이 없을 것 같았던 세계가 마침내 끝이 났다.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침내… 끝난 건가…”

누가 한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한 사람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그 소리를 여기 있는 모두가 공감했다.

짧으면 짧은 시간, 길면 긴 시간.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지옥에서 살아남고, 또 살아남아 끝을 본 사람들이었다.

우는 사람이 있었다. 웃는 사람도 있었다. 허탈한 사람도, 멍하니 하늘을 보는 사람도 있었다. 모두가 다 제각기 다른 얼굴로 가만히 서 있었다.

“수고했다.”

가장 선두에 서 있던 남자의 말을 끝으로 사람들은 하나둘 긴장을 풀었다.

“아아… 드디어 끝났다.”

“지구로 돌아가면 이제 뭘 해야 하나.”

“그러게.”

이제 두 번 다시 싸울 일이 없다. 그 생각에 굳어 있던 영웅들의 표정이 조금씩 생기가 돌았다.

“대장님.”

선두에 있던 남자 근처로 한 남자가 다가갔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 하시지요.”

그 말에 영웅들은 선두에 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흠.”

모든 것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줄곧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던 남자가 다른 영웅들을 둘러보았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그는 한 명씩 차례대로 얼굴을 마주 보면서 말을 이었다.

“우리는 단합했고, 승리했다. 불가능할 것 같았던 이 지옥의 끝을 여기 있는 모두가 함께 이겨냈다. 우리는.”

남자는 다시 한번 힘차게 말했다.

“승리했다.”

그 말에 모두가 열광했다. 누구는 환호를, 누구는 주먹을 불끈 쥐었고, 누구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대장님께서 사용하시지요.”

옆에 서 있던 남자가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그것에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누가 사용하던 상관없었으니까.

“그러지.”

선두에 서 있던 남자는 가르바논이 사라진 빛무리로 걸어갔다. 그 아래 떨어진 구체를 줍기 위해서.

저 구체야말로 이들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지구로 돌아갈 수 있는 단 하나의 열쇠.

모두가 다 거기서 끝이라고 생각했다. 여기 있는 그 누구도 다른 상황을 예견하지 못했다.

그런데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그 순간, 무언가가 영웅들을 지나 구체가 있는 방향으로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