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 마리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다섯 암살단 중 하나. 나는 핑크 마리스의 46호 암살자이며, 동시에 이 세계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암살자이기도 했다.

‘이날을 위해서, 지금까지 견뎌왔다.’

저 바깥에, 이 세계의 적인 대마왕 가르바논이 있었다.

저 바깥에, 내가 죽여야 할 영웅들도 있었다.

나는 숨을 죽였다. 가지고 있는 모든 생존 기술을 쓰고, 물약을 마시면서 어떻게든 버텼다. 내가 서 있는 이곳은 전장과는 한참이나 떨어진 장소였는데, 그런데도 대마왕의 광역 공격에는 피해를 보았다.

운석이 떨어지는 곳도 아니고, 검은 불길만 타오르는 외곽. 그곳에서 나는 두꺼운 판금 갑옷과 방패를 들고 때를 기다렸다.

이런 상황을 예견하고 마법 저항이 뛰어난 장비를 갖췄다. 이 갑옷을 입고 방패를 들면 움직이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무거웠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내가 관심 있는 건 저런 대마왕 따위가 아니었다.

‘조금 힘내보라고, 마왕 나으리.’

과연 최종 보스라는 이름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대마왕의 공격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했다. 눈에 보이는 공격 패턴만 12가지. 거기다 장비의 특수 능력까지 더하면 최강이라 불려도 손색없는 괴물이었다.

나만 봐도 그렇다. 체력이 낮은 암살자라고는 하나, 최소 5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서 불길 하나만 맞고 있는 상태인데도 체력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것도 온갖 방어구를 다 둘렀는데 말이다.

‘다행히 포션은 넉넉해.’

포션을 마시면서 개수를 확인했다. 187개. 이 정도면 충분한 양이었다. 이곳에 오기 전, 나는 가지고 있던 소모품을 전부 포션으로 바꿔놓았다. 이유는 딱 하나. 영웅들의 뒤를 치기 위해서였다.

‘자. 선택지는 두 가지다.’

날카롭게 전장을 둘러보면서 나는 현재 내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을 고민했다.

하나. 영웅들의 뒤를 친다.

둘. 보스의 전리품을 빼앗는다.

지금 내가 영웅들의 뒤를 치면 최소 다섯 명은 죽일 수 있었다. 많으면 일곱 명. 하지만 그것이 한계였다.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야.’

너무나 많은 일이 있었다. 복수를 다짐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자리까지 도달했다.

겨우 다섯, 일곱 명한테 복수하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었다. 전부.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다 죽는 그림을 만들려고 여기까지 쫓아왔다.

‘사제만 공격한다고 했을 때, 보스 공략의 난항을 겪는다면 최소 열 명은 더 죽겠지.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냉정하게 바라봤을 때, 이 전투의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대마왕 가르바논이 진다.’

비록 암살자에 불과한, 보스 공략 따위는 한 번도 안 해본 초짜지만. 그 정도는 예측할 수 있었다.

공략이 지나치게 안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전투가 시작된 지 1시간이 넘었다. 보스의 체력도 많이 줄어들었고, 당연히 영웅들의 체력과 마력도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다만 지나치게 안정적인 게 문제였다.

‘영웅은 영웅이다, 이건가.’

말도, 눈길도, 표정도 없었다. 피할 건 피하고, 막을 건 막았다. 자리가 바뀌어도, 공격을 멈추는 것도, 다 같이 이동할 때도. 이들은 마치 하나가 된 것처럼 움직였다.

일심동체. 지난 몇 년간 호흡을 맞춘 영웅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자리와 할 일을 찾았다.

‘내가 나선다고 해도, 저 균형을 무너뜨리는 건 쉽지 않겠지.’

여기서 실수로 누가 죽는다고 해도 공략 시간이 길어질 뿐, 공략을 실패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때를 기다렸다. 아직은 시간도, 포션도 충분했으니까.

40%… 30%… 20%…

암살자인 나는 적의 체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빠르게 줄어드는 보스의 체력을 보고, 영웅들의 정보도 함께 훑어보았다.

‘끝났네.’

사제들의 마력이 절반 이상 남았고, 체력이 절반 이하로 떨어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거기다 한 가지 더. 지금까지 아무런 사상자도 발생하지 않았다.

예상한 결과였다. 머리로는 이해해도, 그 모습에 괜히 화가 났다.

‘젠장… 그냥 다 죽어버리지.’

머리와 속마음이 따로 놀았다. 평소라면 이렇게 생각을 한 것만으로도 ‘위기 감지’, ‘자동 공격 방어’ 등의 스킬로 내 존재를 간파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혼란스러운 전장 속에서 작게 생각만 하는 내 존재가 간파당할 정도로 나는 어수룩하지 않았다.

지금이 아니면 이제 이런 생각도 할 수 없겠지. 나는 공격 의사를 마음껏 표출했다.

“크아아아!!!”

마침내 보스의 체력이 10% 아래로 떨어졌을 때. 불길이 더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시작됐나.’

라스트 페이즈. 내가 생각하기에 저건 자폭이 분명했다. 여기 있으면 나까지 폭발에 휘말릴 수 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차라리 저 괴물 놈이 터졌으면 좋겠다. 여기서 저 보스가 터지면 전멸이었다. 내가 죽는 것보다 저 쓰레기들이 다 죽는 게 더 중요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겠지.’

과연. 저 빌어먹을 놈들은 상황 판단도 빨랐다.

영웅들의 자세가 바뀌었다. 사제들은 더 이상 회복에 전념하지 않았고, 전사들은 방패를 버렸다. 무조건 공격. 터지기 전에 상대를 끝내겠다는 것이다.

‘지금 나서면 열 명은 더 죽이겠네.’

그런데도 나서지 않았다. 단지 나설 준비만 했다. 나름 최종 보스겠다, 내가 예상하지 못한 패턴이 존재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대마왕이 조금이라도 영웅들의 균형을 무너뜨리면, 나는 기꺼이 내 한 몸 바쳐 영웅들을 죽일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상황은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대마왕 가르바논은 끝내 영웅 한 명 죽이지 못하고, 빛이 되어 사라졌다.

“…”

사라져가는 대마왕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쓸모없네, 저거.’

한숨은 짧게. 나는 더 이상 대마왕 따위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자,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적들의 의심을 사면 바로 끝이었다. 내게 ‘공격’ 의사가 있다고 느끼는 순간, 적들의 ‘기척 감지’, ‘위기 감지’ 등의 스킬이 날 눈치챌 테니까.

마음을 비우고 때를 기다렸다. 전투가 끝나고, 영웅들이 긴장을 푼 잠깐의 시간. 그 짧은 시간을 놓치지 않은 나는 행동을 개시했다.

먼저 생각을 비웠다. 머릿속에 자리 잡은 살인 욕구를 완벽하게 지웠다. 나는 암살자. 누구보다 냉정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1초면 내 머릿속을 백치로 만들 수 있었다. 머릿속을 완전히 비우고, 단 한 가지만을 머릿속에 담았다.

‘저걸 주워.’

보스가 죽고 사라진 장소. 그 바닥에 떨어진 투명한 구체.

생각과 동시에 달렸다. 내가 가진 모든 이동 기술을 동원해 전력으로 뛰쳐나갔다.

“어?”

목표 지점까지 절반 정도, 거리상으로는 약 2킬로미터 남았을 때. 누군가가 나를 눈치챈 듯했다. 당황한 얼굴로 날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상관없어.’

다른 쪽은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부터 달린다고 해도, 이제는 내가 더 빨랐다.

달리던 발을 멈췄다. 자세를 낮추고, 최대한 힘을 다리 쪽에 집중시켰다. 동시에 땅을 박차고 앞으로 몸을 날렸다. 균형을 포기하고, 오직 속도만을 내기 위한 자세. 총알보다 빠른 몸이 내 의지를 벗어나 최고 속도로 날아갔다.

‘날아오는 투사체는 다섯. 머리, 왼쪽 어깨, 왼쪽 가슴, 오른쪽 다리 두 개.’

나는 조금 감탄했다. 예상하지 못한 나를 인식하고, 내 행동을 예측한 뒤 공격. 여기까지 걸린 지연 시간이 제로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거의 인식과 동시에 화살과 마법을 쏟아냈다.

‘그래도… 내가 이겼다.’

-곡예 Lv 마스터. 회피 Lv 마스터. 공격 예측 Lv 마스터.

날아가는 몸을 회전시켜 공격을 전부 회피했다. 이렇게 되면 이제 착지하는 게 문제지만, 그건 신경쓰지 않았다. 나는 처음부터 날아가는 중간에 구체를 잡을 생각이었다.

‘지금!’

내 인지 속도보다 빠르게 몸을 움직이고 있어서 감으로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단 한 순간도 실패를 생각하지 않았다. 내 몸을 믿었으니까.

-아이템 ‘???’ 을 획득했습니다.

왼손으로 구체를 잡고, 동시에 자세를 세워 오른 발로 땅을 한 번 박찼다. 투사체를 막느라 네 번이나 돌았던 몸이 중심을 잡지 못해서였다. 너무 빨리 오는 탓에 속도가 다 줄어들지 않았고, 나는 한 번 더 돌면서 오른손으로 허리춤에 있는 단검을 뽑았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이 약 0.3초 안팎. 나는 착지와 동시에 단검을 구체에 가져다 대고 큰 소리로 외쳤다.

“전부 동작 그만!”

영웅들이 긴장을 푼 순간, 가진 모든 이동기를 사용해 구체를 훔쳤다. 그런데 그 잠깐 사이에 모든 영웅들이 무기를 들고 5미터 안팎으로 날 포위했다.

“지금부터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움직이면, 이걸 부수겠다.”

내 협박에 영웅들은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고 사납게 노려보았다. 아이고, 무서워라.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노려보지마. 자꾸 그러면… 이거 진짜 부숴버린다?”

내 말에 대다수의 영웅들이 당황해서 뒷걸음질 쳤다. 물론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고, 여전히 날 노려보던 사람 중 하나가 사납게 말했다.

“이봐, 암살자. 너도 원하는 건 우리와 마찬가지잖아? 그걸 사용하면 지구로 돌아갈 수 있다. 너도, 우리도 원하는 결과지. 네 녀석도 지구로 돌아가고 싶은 거 아냐?”

지구? 내가 알고 있는 그게 맞는 건가? 원래 살았던 땅?

나는 영웅의 말에 실소를 터트렸다.

“돌아가? 돌아간다고?”

내가 웃자 영웅들의 표정이 심란하게 변했다. 그것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내가 원하는 건 딱 하나. 바로 너희, 영웅들의 죽음이다.”

“뭐…”

“지구? 안 돌아가도 돼. 아니, 다시 말하지. 아무도 못 가. 너희들은 평생 이 지옥 속에서 살아야 하거든. 절대로 못 보내줘.”

나는 폭소를 터트리면서 말을 이었다.

“이게 없으면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지? 그게 내가 원하는 거다. 절망. 고통. 너희들이 나에게 준 감정을, 너희들도 똑같이 느껴보라고. 너희들과 내가 같다고? 개소리하지 마!”

거기까지 말했을 때, 몸이 경고를 보냈다. 주의하라고.

‘투사체인가.’

마법과 화살이 구체를 들고 있는 왼손과 단검을 쥔 오른손을 노리고 날아왔다. 피할 수도 있지만, 굳이 피하려 들지 않았다.

이미 늦었으니까.

몸이 경고를 보낸 순간, 난 왼손으로 구체를 으깼다.

푸슈슉!

예상한 공격. 나는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급소를 노출했다. 마법이 내 오른팔을 얼리고, 화살이 내 왼쪽 팔목 깊숙히 박혔다. 또 심장에도 두 개나 박혔다.

“지금이야!”

공격을 맞고 쓰러져가는 내 손에서 구체가 떨어졌다. 그 즉시 영웅 하나가 잽싸게 뛰쳐나와 구체를 향해 뛰어드는 게 보였다. 하지만 구체는 내 손에서 벗어난 순간 깨지면서 파편으로 떨어져 나갔다.

“…아?”

“꺄아아악!”

“아…안 돼…!”

영웅들의 비명이 들렸다. 그 소리를 듣고 나는 다시 한번 웃었다.

‘됐다. 다 끝났다.’

급소에 맞은 건 심장에 박힌 화살 두 개가 전부인데, 체력이 0에 다다랐다. 원체 체력이 낮은 암살자이기도 하고, 속도를 높이기 위해 얇은 가죽 갑옷을 착용해서였다.

‘나도 이제 죽는구나.’

일부러 그랬다. 험한 꼴을 당하기 전에 먼저 죽는 게 나았으니까. 이제 저 멍청이들은 나한테 복수하고 싶어도 복수할 수 없겠지. 그게 가장 마음에 들었다.

죽음이 아쉽지 않냐고?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 나는 모든 것을 이루었으니까.

죽어가는 순간 깨진 아이템을 보았다. 그것으로 만족했다.

처음부터 내가 원했던 건, 여기 있는 모두를 절망에 빠트리는 것.

‘그 소원이 이루어졌다.’

심장을 관통한 화살이 너무 아팠다. 너무 아픈데…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내가, 내가!

마침내 복수를 이루었다.

조금씩 의식이 멀어졌다. 이제 나는 어디로 갈까? 천국은 당연히 못 가겠지. 남은 건 지옥뿐인가. 뭐, 나쁘지는 않았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내 동료들이 떠올랐다.

‘있지, 내가 복수했어. 너희들 몫까지 전부.’

오랜 시간이 걸렸다. 포기를 모르는 나도 포기할까 싶을 정도로 힘들었다. 모든 동료가 죽고, 나 혼자밖에 남지 않았을 때. 더 이상 싸우는 게 의미가 있나 절망에 빠진 적도 있었다. 그래도 난 꿋꿋하게 살아남았다.

결국 승자는 내가 되었다. 내가 이겼다.

그래서 난 미소 지으며 떠날 수 있었다. 정말로 오랜만에 엄청난 환희를 느꼈으니까.

‘수고했어, 나.’

눈을 뜨면 이제 다른 세상이 보이겠지. 그곳에서는 어떤 빌어먹을 일들이 일어날까? 여기보다는 편할까? 죽은 내 동료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 때, 주마등처럼 과거의 일도 떠올랐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 가족과도 같은 친구, 동료들을 잃었다. 다 내가 힘이 없어서였다. 그래서 복수를 다짐했다.

…내가 조금만 더 힘이 있었더라면, 이 이야기가 달라졌을까.

…내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내 주변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을까.

죽기 직전,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돌아갈 수 있다면, 그때는…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 속에서 마지막으로 내게 목소리 하나가 들렸다.

-그것이 네 소원인가?

-이루어질 것이다.

-아이템 ‘???’을 사용했습니다.

-당신의 소원은 이루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