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이 일그러지면서 눈 깜짝할 사이에 장소가 바뀌었다. 차원 도약. 처음 경험해보면 괴상한 기분을 맛볼 테지만, 과거 몇 차례 차원 도약을 해봤던 나는 익숙하기만 했다.

‘도착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숲속 한가운데 서 있었다.

“어…어?”

“이게 대체 뭐야!”

“꺄아아악!”

사람들의 비명이 들리자 나는 반사적으로 소리가 나는 곳을 쳐다보았다.

‘이십 대 남녀 하나, 남자아이 하나, 아저씨 하나.’

나를 포함하면 총 다섯 명이었다.

‘아무래도 과거로 돌아온 게 맞는 모양이네.’

모든 시작 지점에는 각각 다섯 명씩 떨어졌다. 제대로 온 게 맞았다.

다른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 나는 빠르게 네 사람의 얼굴과 신원을 파악했다.

‘전부 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다.’

딱히 기대하지 않아서 실망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아는 얼굴이 있었으면 복을 걷어찬 예전의 나를 욕했을 것이다.

그렇다. 무엇을 숨길까. 예전의 나는 여기 있는 네 명과 따로 떨어져 움직였다.

차원 도약의 후유증일 수도 있고, 숙취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단순히 공포에 질렸을 수도 있다. 뭐가 됐든 분명한 건 느닷없이 숲속 한가운데 떨어졌고, 오직 살아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지금 생각해보면 난 여기서 운을 다 쓴 것 같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이 숲에 혼자 떨어져서 산 사람은 2할도 채 되지 않았다.

‘그것도 내가 잘해서는 아니었지.’

20년 전. 나는 도망쳤고, 정말 천운으로 다른 일행을 만났다.

‘박현섭.’

이 세계에서 만난 몇 없는 좋은 사람. 나는 그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 숲에서 처음 만난 날 기꺼이 일행으로 받아주고, 같이 이 년 이상 활동했다.

비록 끝은 좋지 않았지만, 박현섭은 마지막까지 나에게 좋은 인물로 남았다.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는데…’

희망은 하되, 과거처럼 혼자 떨어지지는 않았다. 이미 셀레브리엄에서 고민한 일이었기 때문에 큰 미련은 없었다.

‘확률이 너무 낮으니까.’

과거의 나는 정말로 정신없었고, 겁에 질려 막 돌아다녔다. 그때 내가 어느 길로 갔는지는 당연히 기억에 없었다.

이 숲은 굉장히 넓고, 모든 일행이 대부분 멀리 떨어져 있었다. 실제로 다른 일행을 만났다는 얘기는 굉장히 드문 편이었다. 즉, 다른 사람을 찾고 싶다고 해서 찾을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괜히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것보다 처음 일행과 함께하는 게 좋았다.

‘그래. 이제는 도망치지 않아.’

쉬운 길을 놔두고, 굳이 어려운 길을 택할 이유는 없으니까. 나는 차분히 주변 사람들의 행동을 살펴보았다.

이 시작 지점에서 보이는 반응은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었다.

첫째. 겁에 질려 도망친다.

둘째. 겁에 질려 웅크린다.

셋째. 겁에 질려 함께 뭉치자고 한다.

넷째. 숲을 탐험한다.

이쯤에서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여기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네 사람은 앞으로도 가망이 없었다.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니까, 아마 어디서 죽거나 이름 없는 모험가가 됐을 확률이 높았다.

‘적어도 한 명쯤은 정신이 박힌 사람이 있었으면 하고 기대했건만. 괜한 기대였나.’

천사가 알려준 것도 그렇고, 기초 훈련을 받은 것도 그렇고. 이 세계는 정말로 친절하게 다 알려주었다. 예전에는 그렇게 느끼지 못했으나, 다시 한번 이 과정을 되풀이해보니 얼마나 사람들의 편의를 봐줬는지 알 수 있었다.

‘대륙 케르피아에 들어가면 지금보다 더한 일이 수두룩한데. 이 정도로 겁에 질려서야…’

이 심정을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나도 이곳에 처음 떨어졌을 때 얼마나 당황했었나. 지금도 기억하는 건 정신없이 숲을 가로지른 것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면 정말 웃기는 일이었다. 큰 위험도 없는 이 숲에서 겁에 질리다니. 냉정하게 따져보면, 그냥 눈떠보니 무인도에 떨어진 정도밖에 되지 않은가.

“저, 저희 이제 어떻게 하죠?”

“살려주세요! 흑흑!”

아직 시작도 안 했으니 적당히 지켜볼까. 나는 조금씩 먹구름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진정할 때까지 기다렸다.

“꺼져! 다 꺼지라고! 니놈들도 한 패지? 난… 난 몰라! 다 꺼지라고!”

그때, 덩치 큰 사내가 달아나려고 하는 게 보였다.

“가지 마요!”

“비켜! 이 괴물들아! 으아아아!”

아저씨가 급히 사내의 팔을 붙잡지만, 사내는 그 손을 뿌리치고 멀리 달아났다.

‘괴물이라.’

딱히 저 남자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여기 오기 전에 선택한 교육은 아마 전투. 어떻게 싸우는지에 대해서 배웠을 테고, 그 대상은 인간이었을 게 분명했다.

‘그게 정석이니까.’

대륙에 사는 괴물들은 인간형이 많았다. 보기 힘든 마족부터 시작해 보기 쉬운 고블린, 오크 등등 대부분의 괴물들은 두 다리와 두 팔이 달린 인간형 몬스터였다.

어떻게 하면 인간을 효율적으로 죽일지 배우고 이 세계에 떨어졌다. 처음 보는 사람을 보고 한 패라고, 괴물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건 그렇고… 와우.’

도망쳐야 할까. 말아야 할까. 저 사람 말대로 여기 있는 사람들은 한 패일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을 나는 그저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렇게 되면… 이 사람들은 여기서 다 죽었을 수도 있겠구나.’

저 덩치 큰 사내. 그리고 나. 두 사람이 빠지면 세 명이 남는다. 물론 세 명이서도 이 숲에서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다만…

‘여자 하나. 아이 하나. 아저씨 하나라니.’

어디는 젊은 남녀로 다섯 명이 한 조인데, 여기 조는 전투력을 기대하기 힘들 정도로 조합이 안 좋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조합으로 싸움이 가능한지가 의문이었다.

투둑. 투둑.

손등에 빗방울이 떨어졌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먹구름이 가득한 게 보였다.

‘시작인가.’

여기서의 임무는 간단했다. 일주일 동안 생존. 참고로 이 숲은 일주일 내내 비가 쏟아졌다. 즉,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마음 같아선 혼자 가고 싶네.’

원래 계획은 저들을 다 끌고 가는 것인데, 이 조합을 보니 재고해야 할까 고민됐다. 그러나 순식간에 생각을 접었다. 사람은 한 명이라도 더 있는 게 좋았고, 무엇보다 혼자 떨어진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찾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과거에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다.

“다들, 정신 차리고 제 말에 귀 기울여 주세요.”

나는 일부러 무겁게 입을 열었다. 표정도 찌푸리면서.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 과하게 연기했다.

그런 내 행동이 효과가 있었는지 세 사람은 잠시 정신을 차리고 나를 돌아보았다.

“비가 쏟아지려 하고 있어요. 다른 건 다 제쳐두고, 우선 비부터 피해야 합니다.”

“비…요?”

“정말이다. 먹구름이…”

“그, 그래. 맞아. 비를 피해야 해…”

“어, 어디서 피하죠?”

“숲이니까 어디 큰 나무가 있겠죠. 산이 많이 보이니까 찾아보면 동굴 같은 곳도 있을 테고요. 뭐가 됐든 비 먼저 피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보았다. 빗줄기가 조금씩 굵어지고, 점점 더 많이 내리고 있었다.

“출발하죠.”

“네? 자, 잠시만요! 어디로…”

“방향도 모르고,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니까 아무 데나 가는 겁니다.”

진짜로 아무 데나 가도 상관없었다. 이 숲에서 나가는 건 불가능하니까. 여긴 임시로 만든 하나의 ‘장소’에 불과했다.

그런 내 생각을 증명해주듯 퀘스트 창이 하나 떴다.

띠링!

-튜토리얼 퀘스트 : 생존.

-낯선 세계에 떨어진 당신. 당신은 이제부터 살아남는 법을 터득해야 합니다. 이곳에서 일주일간 생존하십시오.

-남은 시간 : 6일 23시간 59분.

심플한 퀘스트 창. 어차피 별 내용이 없다는 걸 알고 있어서 바로 꺼버렸다.

“자. 움직이죠.”

사람들은 잠시 주저했으나 결국에는 내 말을 따랐다. 여기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비만 쫄딱 맞게 생겼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내가 먼저 움직이자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내 뒤를 밟았다.

‘일단 시작은 최악인가.’

나는 간략하게 이곳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이 숲에서 ‘히든 피스’는 두 가지다.’

이 숲은 원래 도적들의 소굴이었는데, 알 수 없는 괴물이 나타나면서 도적들이 급하게 도망친 곳이라는 설정을 가지고 있었다.

히든 피스는 바로 그 괴물과 도적들의 보물창고. 나는 그 두 가지를 전부 다 알았다.

‘쓸모없는 정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도움이 되는구나.’

이 숲은 대륙 케르피아에 들어가면 다시는 오지 못하는 장소였다. 그래서 이 히든 피스를 찾은 사람들은 쉽게 정보를 뿌렸고, 나도 그런 게 있구나 하는 정도로만 넘어갔다.

과거로 돌아온 지금은 다르지만 말이다.

‘나는 도적들의 보물창고를 노린다.’

난이도로만 놓고 따져 보았을 때, 괴물이 조금 더 난이도가 높고 보상이 좋았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다면.

괴물을 죽이고 나오는 아이템이 마법사 전용이라는 것이다.

‘괴물을 죽이면 히든 클래스와 함께 유니크 지팡이를 주지. 확실히 이 숲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보상이고, 케르피아에서도 얻기 힘든 보상이야. 하지만 나한테는 쓸모가 없어.’

20년간 검을 들고 싸웠다. 아무리 미래를 알고 전투에 자신 있다고는 하나, 한 번도 접해보지 않은 영역에 손을 대고 싶지는 않았다.

‘그에 비해 도적들의 보물창고는 아이템만 주는 대신, 원하는 보상을 선택할 수 있지.’

내가 듣기로 도적들의 보물창고는 다음과 같은 특성을 지녔다.

들어간 인원수에 맞게 보상을 주고, 원하는 아이템을 준다.

이게 내가 가능하면 많은 일행을 끌고 가려는 이유였다.

‘하나라도 더 먹는 게 좋으니까.’

나는 저들을 도와줄 생각이 없었다. 적당히 도와주는 척하며 어떤 인간들인지 살펴보고, 그 후 일행으로 데려갈지 말지를 정할 생각이었다.

만약 내 기대에 충족하지 못한다면.

‘죽이면 되지.’

물론 보상을 얻고 난 후에 일이지만. 나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았다.

“뭐, 뭐 하시는 거예요?”

“이, 이봐!”

“으아악!”

내가 검을 꺼내 들자 사람들은 기겁하며 물러났다.

“다들 무기를 들고 있어요. 여기 오기 전에 무기를 하나씩 받았잖아요?”

“그, 그렇긴 한데…”

“천사들이 한 말을 떠올려 봐요. 싸울 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이상한 괴물 놈들이랑 말이죠.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니까, 무기를 들고 있는 게 나을 겁니다.”

내 말에 사람들은 그제야 허겁지겁 무기를 들었다. 뭐, 무기라고 해봤자 내가 들고 있는 싸구려 검과 똑같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고블린을 잡는데 문제없지.’

내가 듣기로 이곳에 사는 몬스터는 딱 두 종류뿐이었다. 히든 피스인 괴물 놈 하나와 고블린들. 실제로 과거 내가 이곳에서 싸운 몬스터도 고블린이 전부였다.

비를 맞으면서 나는 사방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일단 흔적은 발견했다.’

걷다 보니 나뭇가지가 억지로 꺾인 흔적이 보였다. 무언가가 지나가면서 만든 자국. 고블린의 흔적이었다.

이걸 따라가면 놈들을 쫓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적당히 모른척하며 숲을 돌아다녔다.

짧은 시간에 불과하지만, 나는 차분하게 일행을 이끌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비이상적인 행동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단순히 차분한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한 번에 흔적을 찾으면 쓸데없는 의심을 살 수 있었다. 저놈 뭔가 알고 있는 거 아니냐고. 괜한 의심을 받는 것보다 조금 멍청하게 구는 편이 나았다.

‘남들보다 조금 더 침착하고, 뛰어난 정도면 돼. 그 이상으로 의심받으면 골치 아파져.’

다른 사람들이 흔적을 발견해 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없었다. 결국, 나는 한참을 빙빙 돌다 세 시간이 지나서야 흔적을 쫓았다.

“허억… 허억…”

“너무 축축해요…”

“비를 피할 곳이 마땅히 없네요. 다들 잘 찾아보고 있나요?”

그렇지 않다는 건 내가 더 잘 알았다. 그래도 물어보았다.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도 많이 받은 상태에서 비까지 맞고, 그 상태에서 한참을 걸었다. 쉬고 싶어도 쉴 수가 없고, 걷는 속도를 조금 늦춘 게 다였다. 그렇게 세 시간 이상을 버텼는데, 정상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으면 그게 더 이상했다.

“아, 다행히 제대로 도착한 모양이네요.”

“…네?”

비에 흠뻑 젖은 세 사람은 내 말에 눈을 깜빡였다.

“무슨 소리예요?”

“저기 저 앞에. 보이세요?”

“어디… 으아헙!”

앞으로 나온 아저씨가 비명을 지르려는 순간, 나는 아저씨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조용히 해요. 아무리 비가 쏟아져서 시끄럽다지만, 우리가 여기 있는 거 대놓고 광고라도 하시게요?”

“읍! 읍! 읍!”

“자. 저기 동굴이 있네요. 좀 오래 걸리긴 했어도 다행히 목적지는 제대로 찾은 것 같아요.”

내 말에 다른 두 사람의 얼굴이 시퍼렇게 변했다. 그들도 내가 가리킨 방향을 본 것이다.

확실히 거기에는 동굴이 하나 있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다면, 그 앞에 고블린 다섯 마리도 함께 서 있었다.

지구인이라면 태어나서 처음 보는 괴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