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기를 다 듣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같이 들어가자는 말에 쉽게 동의했다. 물론 내 심정이 그렇다는 얘기고, 겉으로는 몇 번 튕겼다.

“음… 저는 조금 걱정이 되네요. 우리가 공격했던 것처럼, 저 숲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일이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일단은 안에서 좀 쉬는 게 어떨까? 옷도 다 젖었잖아.”

아저씨는 열심히 설명했다.

“불침번은 조금 있다가 서도 되지 않을까? 다들 체력이 많이 떨어져서, 솔직히 지금 또 싸우라고 하면 못 싸울 것 같아.”

“그것도 그렇네요. 지금은 일단 쉬는 게 낫겠습니다.”

“그렇지?”

나를 설득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저씨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뭐, 그렇게 생각해도 상관없겠지.

아저씨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두 사람이 옷을 벗고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속옷. 불편하지 않나?’

두 사람 다 속옷은 입고 있었다. 젖어 있는 속옷을 입고 있으면 굉장히 불편할 텐데. 아무래도 인간의 마지막 자존심이 지켜주고 있는 것 같았다.

“…저기요.”

“네.”

“너무 그렇게… 빤히 쳐다보지 말아 주실래요?”

흠. 걱정돼서 본 걸 아무래도 오해한 모양이다.

“실례. 저는 그저 속옷도 벗고 있으면 훨씬 더 편할 거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던 거예요.”

“미, 미, 미쳤어요?!”

여자가 자기 가슴을 가리면서 소리쳤다. 그래봤자 별로 보고 싶지도 않고, 볼 것도 없었다.

‘사실인데.’

못 봐줄 몸매는 아니었다. 자기 관리를 잘했는지 날씬했고, 군살이 없었다. 얼굴도 고양이상에 이쁘고 나름 매력적인 여자였다. 지구에서 대학교를 다녔다면 분명 인기가 많았을 것이다.

내 눈에는 그저 그랬지만.

나는 옷을 벗었다. 속옷도 같이 벗으려다가 그만두었다.

다른 사람이 다 속옷을 입고 있기도 하고, 저 여자가 또 비명을 지를 것 같아서 그랬다.

“후우.”

“어때, 따뜻한 곳에서 쉬니까 좀 낫지 않아?”

“예, 그렇네요.”

사실 별반 차이를 못 느꼈다. 체온이 오르고 있기는 한데, 떨어진 체온을 못 버틸 정도로 체력과 정신력이 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체력을 기르면 좋은데 말이지.’

여기서 성장한 능력은 후에 분배된다. 내가 체력을 기르면 기를수록 이곳에서 나갈 때 보답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나는 한계까지 체력을 사용할 생각이었고, 지금부터 꾸준히 체력을 소비해야 했다.

“이왕 다 모였으니 내일 계획부터 말하죠. 우선, 식량이 문제입니다.”

“식량…”

그제야 다들 배고픔을 느꼈는지 침을 삼켰다. 하긴. 지금까지는 긴장과 두려움, 그런 감정들이 더 커서 배고픔을 느끼지 못한 것이지 배고픔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식수야 지금 비가 내리고 있으니까, 빗물을 마셔도 좋고 빗물이 고인 장소를 찾아 퍼마셔도 됩니다. 위생이 조금 걱정되기는 한데, 죽는 것보다는 낫죠.”

나는 말을 이었다.

“문제는 식량입니다. 다들 오면서 잘 둘러봤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제가 봤을 때는 열매를 맺은 나무를 본 적이 없어요. 그렇다고 아까 그 괴물을 먹을 수는 없으니까, 우리는 내일부터 식량을 찾기 위해 숲을 샅샅이 둘러봐야 합니다.”

정말 급하면 고블린을 먹을 수도 있었다. 정말로 급하면 말이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지.’

나는 고블린이 싫었다. 단순히 맛이 없었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 몇 번 먹은 적이 있지만, 그 이유가 아니라면 솔직히 손도 대기 싫었다.

“뭐, 내일 일은 내일 아침에 다시 상의하도록 하죠. 세상일이라는 게 당장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여자와 아이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이미 이 숲에 떨어진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니까, 여기서 더 이상한 일이 생긴다고 해도 체념할 수밖에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 그렇긴 하지. 자자. 이 친구 말이 맞아.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고, 오늘 하루는 고생했으니까 푹 쉬자고.”

“그것도 그렇네요.”

“흠흠. 그럼 이제 간략하게 자기소개를 해볼까?”

“자기소개요?”

“그래. 여기 퀘스트라는 걸 보면, 일주일간 생존하라고 나와 있잖아. 여기 있는 사람들끼리 당분간 같이 생활할 것 같은데 저기요, 그쪽, 뭐 이렇게 부를 수는 없잖아.”

맞는 말이었다. 아저씨가 먼저 말하지 않았다면, 내 쪽에서 먼저 말했을 일이었다.

“그렇네요.”

“그렇지? 하하. 가볍게 통성명이나 나누자고. 내가 여기서 가장 연상인 듯하니까, 먼저 소개해볼까?”

다시 한번 헛기침한 아저씨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편하게 말했다.

“이름은 장태윤이고, 나이는 마흔. 보시다시피 그냥 평범한 아저씨야. 다들 편하게 이름으로 불러도 좋고, 아저씨라고 불러도 상관없어.”

장태윤. 나이 마흔. 뱃살이 조금 많고, 정돈 안 된 수염에 젖어있어도 헝클어진 머리. 자기 관리가 많이 부족한 사람으로 보였다.

‘지구에서 정신없이 일에 치인 사람이겠네.’

“태윤 아저씨라… 기억할게요. 직업은요?”

“프로그래머였어. 뭐, 대기업은 아니지만 중소기업에서 일하고 있지.”

프로그래머는 여기서 쓸모가 없고. 나이는 마흔이라. 운이 지지리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 세계는 나이 제한이 있었다. 너무 어려도 살기 힘들고, 너무 많아도 살기 힘드니까. 그래서 여기 세계로 떨어질 수 있는 나이는 열 살에서 마흔 살까지. 그 안에서 무작위로 뽑혔다. 즉, 이 아저씨는 여기 떨어진 사람 중에서 최고 연장자라는 소리였다.

그리고 당연한 얘기지만, 십 대의 어린 애들과 마흔 가까이 되는 사람들은 이십 대의 젊은 사람들과 비교하면 여러 가지 부족한 점이 많았다.

체력, 근력, 순발력 등. 이렇다 보니 아무래도 케르피아에서 크게 될 수 없는 나이대였다.

‘꼭 모든 사람이 그런 건 아니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이 그랬다.

“가족은요?”

여자의 말에 아저씨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아내가 있는데… 어떻게 됐는지는 잘 모르겠네.”

“아… 죄송해요…”

“아냐. 신경 쓰지 마.”

다시 분위기가 어두워지려고 할 때쯤. 화제를 돌려야겠다고 생각해 내가 앞으로 나섰다.

“그쪽보다는 제가 더 연상인 듯 싶으니, 먼저 소개하죠. 강성민이라고 합니다. 나이는 스물여섯이고, 백수입니다.”

내 말에 여자는 뭔가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죠?”

“아뇨… 그, 뭐냐. 뭔가 특이한 직업을 가지고 있을 것 같아서요.”

“성민이라 그랬지? 성민아. 네가 너무 차분하고, 상황 판단도 빨라서 그런 거야. 오해하지는 마.”

“아, 그런 거였군요.”

나는 차분히 내가 생각한 설정을 말했다.

“대학교에서 서바이벌 동아리 회장이었습니다. 캠핑도 자주 가고, 산속에서 야영도 몇 번 해보고, 군대에서 해본 적도 있고… 여행 다니는 걸 좋아해서 이것저것 잡다한 지식이 좀 많습니다.”

“아아… 그런 동아리도 있나 보네요.”

나도 모르지. 있는지 없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내가 대학을 다닌 건 사실이었다. 그런데 난 별다른 동아리 활동을 하지 않았고, 그런 동아리가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내가 어느 대학교를 다녔는지는 아무도 모를 테고, 그 대학교에 그런 동아리가 있는지 확인도 할 수 없을 테니까.’

지구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솔직히 저도 처음에는 좀 당황했습니다만, 그것보다 몸이 먼저 움직여지더라고요. 괜히 어영부영 가만히 있으면 시간만 버리고, 아무것도 못 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급히 움직였는데… 혹시 힘들었다면, 미안합니다.”

“아냐, 아냐. 오히려 그때 빨리 안 움직였으면 지금도 비를 맞고 추위에 벌벌 떨고 있겠지.”

“마, 맞아요. 형은 잘했어요. 고마워요.”

“…조금 정신없긴 했지만, 그래도 잘 해주셨어요.”

내 소개는 훈훈하게 마무리됐다. 이로써 내가 숲에 대한 어느 정도 지식을 말한다 해도 일행은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소개한 사람은 젊은 여자였다.

“한세연이라고 해요. 나이는 스물둘. 대학교 삼학년이고, 전공은 경영학이에요. 그것 말고는 딱히 더 소개할 게 없네요.”

아까 말했듯이 나름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남자아이는 그것을 아직 잘 모르는 모양이고, 태윤 아저씨는 아까부터 세연 쪽을 쳐다보지 못했다.

‘아내가 있다고 했으니 괜히 더 죄짓는 기분이 들겠네.’

그녀의 소개는 그것으로 끝이었고, 다음으로 소개할 사람은 남자아이였다.

“김준영이에요… 나, 나이는 10살이고… 은빛 초등학교… 다니고 있어요…”

평범한 남자아이였다. 키가 작고, 우물쭈물 말을 더듬었다. 아마 이런 식으로 자기소개를 해본 경험이 별로 없는 듯했다. 실제로 너무 어린 나이였으니까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최악의 조네.’

어디 조는 건강한 성인 남녀 다섯으로 배정되는데, 내 조는 이렇게 운이 없을 줄이야. 처음에도 생각했던 거지만, 분명 이 조는 과거 여기서 전멸이 났을 게 분명했다.

휘이이잉. 그때, 바람이 세차게 우는 소리에 세 사람은 깜짝 놀랐다.

“바람이네요. 상당히 세게 부는 모양입니다.”

“바… 바람 소리였어요? 너무 커서 다른 소리인 줄…”

아까는 누가 들이닥쳐도 어쩔 수 없다고 했던 여자가 그래도 무섭긴 무서운지 몸을 움츠렸다.

“여기서 이렇게 긴장하면서 네 명이 있는 것 보다, 밖에서 한 명이 불침번을 서고 세 사람이 자는 게 훨씬 나아요. 불침번을 정하죠.”

“그래. 그게 맞는 것 같아.”

태윤 아저씨도 동감했다. 이번만큼은 세연도 반대하지 않았다.

“태윤 아저씨. 먼저 하실래요?”

“응? 나는 괜찮…”

“가장 연장자시니까 배려해 드린 거예요.”

“…아하. 그렇네. 고마워.”

“적당히 한두 시간 있다가 교대해요. 너무 피곤하거나 추워서 교대해도 상관없어요.”

“오케이.”

“아, 그리고 모닥불은 불침번이 관리하도록 하죠. 다행히 여기 나무가 조금 쌓여있으니 하룻밤 정도는 충분할 거라고 봐요.”

“알았어.”

아직 다 마르지 않은 옷을 입고 아저씨가 밖으로 나갔다.

“방금 그게 무슨 소리예요?”

“불침번은 처음과 마지막이 가장 편해요. 중간에 자다 깨지 않으니까요.”

“아.”

사실 생각해보면 간단한 건데, 이런 생활을 안 해봤으면 잘 알지 못하는 정보였다. 저 아저씨는 군대를 갔다 왔을 테니 알고 있는 것이고.

“세연 씨랑 저랑 고생을 좀 더 하자는 얘기에요. 그나마 저희가 젊고, 체력이 좋잖아요. 이해하죠? 준영이한테 중간에 불침번을 서달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아니에요… 저, 할 수 있어요…”

많이 피곤한 모양인지 자꾸만 고개가 내려가는 준영이를 보고 내가 말했다.

“바닥에 깔린 옷 위에 누워서 자. 축축해서 불편하겠지만, 그래도 차가운 돌보다는 나으니까.”

“괘, 괜찮아요…”

“너는 그냥 빨리 자는 게 도와주는 거야.”

처음 옷을 벗겨준 것처럼 나는 강제로 준영이를 눕혔다.

“세연 씨도 누워서 자요. 그게 더 편할 텐데.”

“저… 저는 기대서 잘게요.”

굳이 모닥불에서 멀리 떨어져서 자겠다는 이유가 뭘까. 정말 그렇게 볼 게 많은 몸매는 아닌데 말이지. 나는 똑같이 눕힐까 하다가 말았다.

‘성인인데 지 알아서 하겠지.’

저렇게 자다가 감기라도 걸려 봐야 정신을 차릴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여자에게 신경 쓰지 않고, 조용히 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다.

“…”

잠을 자지는 않았다. 불침번이 있긴 하나, 솔직히 믿을 만한 실력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그저 형식적으로 세운 것에 불과했다. 다른 두 사람이 그 덕에 편하게 쉴 수 있기도 하고.

‘눈의 피로만 풀자.’

과거 나는 3주 연속 잠을 안 자본 적도 있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불가능한 기록이겠지만, 초인이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연히 지금 내 몸은 거기까지 못 따라갔다. 그러나 눈의 피로만 풀면, 일주일은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일부터는 본격적으로 찾아야 하기도하고.’

도적들의 보물창고 찾기. 내가 알고 있는 게 맞다면 그 보물창고의 흔적은 어느 조든 한 번은 찾을 수 있게 되어있었다. 중요한 건 내가 그걸 놓치냐, 안 놓치냐의 차이였다.

그때를 대비해서 눈의 피로는 반드시 풀어줘야 했다.

사납게 휘몰아치는 비바람 소리, 그리고 옅은 숨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앞으로의 일을 다시 점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