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각또각.

천장에 매달린 기다란 형광등, 무광의 백색 타일이 깔린 바닥, 칙칙한 회백색의 콘크리트 벽이 끝없이 이어지는 살풍경의 복도.

길게 뻗은 콘크리트 벽 양쪽으로 짙은 감색의 철문이 3~4미터 간격으로 줄지어 늘어서 있는 복도를 가로질러, 규칙적인 구둣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굽이 낮고 폭이 좁은 검정색 구두, 각선미가 돋보이는 늘씬하고 새하얀 다리를 감싸고 있는 옅은 살색 스타킹, 무릎 살짝 위까지 오는 폭 좁은 검정색 치마와 허리의 폭이 좁아 늘씬한 라인이 강조되는 검정색 정장 슈트.

흠잡을 데 없이 정갈한 옷차림의 주인은, 어딘가를 향해 헤맴 없는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한편, 그 시각.

칙칙한 살풍경의 복도 어딘가에 위치한 다섯 평 남짓의 좁은 방.

마치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듯 모든 것이 정지해 있는 그 칙칙하고도 어두운 공간 안에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가구 몇 개만이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장르가 통일되지 않은 책 여러 권이 들쭉날쭉 꽂혀있는 1인용 독서용 책상과 등받이가 달린 회전의자, 한 팔 너비의 밋밋한 나무 옷장, 그리고 푹신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은 앙상한 철제 간이침대.

그 침대 위에 한 소년이 곤히 잠들어 있었다.

소년의 금빛 머리카락은 백사장의 금모래처럼 은은하게 반짝였고, 눈꼬리가 살짝 쳐진 나른한 눈매는 때때로 미세하게 떨렸다.

이불을 아무렇게나 덮은 채로 깊은 잠에 곯아떨어진 소년의 얼굴은 세상만사와는 동떨어져 있는 듯 평온했다.

소년이 새근새근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쉴 때마다 소년의 흉부가 미약하게 상하운동을 하고 있었다.

마치 정말로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평화롭고도 느긋한 풍경이었다.

하지만,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소년의 평온한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지금 이 시각에도 복도 어딘가에서 울리는 규칙적인 구둣발 소리는 그가 있는 방을 향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침대 머리맡에 걸려있는 바늘시계의 분침과 초침이 ‘0’을 통과하며 ‘6’을 가리키고 있는 시침과 정확히 일자가 된, 그 순간이었다.

– 벌컥.

그의 방문이 예고 없이 열리며, 조용하던 방 안에 불청객의 발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 또각또각.

소년은 울려 퍼지는 발소리를 듣지 못한 듯 여전히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었다.

– 탁.

이윽고 발소리가 그의 침대 바로 옆에서 멈추었다.

그 직후였다.

– 촤악.

그때까지 방 안에 어둠을 가두고 있었던 블라인드가 시원한 소리와 함께 단숨에 걷혀 올라가며, 네모난 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온 눈부신 햇살이 어두웠던 방 안을 순식간에 밝게 만들었다.

“으음···.”

갑작스럽게 눈꺼풀을 뚫고 들어오는 강렬한 햇빛에, 소년은 눈가를 찡그리며 작게 신음했다.

그는 잠시 몸을 뒤척이다가 이내 한 팔을 들어 미간과 눈두덩 위에 올렸다.

머리 쪽에서 쏟아지는 따가운 아침햇살이 그의 이마와 팔을 서서히 달구기 시작했다.

그때.

언제 들어도 무감정하게 느껴지는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에 들려왔다.

“······.”

「기상시간입니다. 에릭.」

그 표현은 그저 단순한 착각이 아니라, 그 목소리는 정말로 머릿속에 직접 들려오고 있었다.

마치 텔레파시와도 같이.

[골전도 통신기].

뇌의 언어 능력을 담당하는 부위에서 발생한 화학·전기로 이루어진 복합신호를 체내에 이식된 IC칩을 이용해 읽어 들인 다음 디지털신호로 변환하는 이 장치는, 육성을 사용하지 않고도 자신의 생각을 상대방에게 전송할 수 있게 해 주는 언어 보조 장치이다.

이 장치는 언어 구사 능력에는 문제가 없는데 발성기관의 고장으로 인해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장애가 있는 사람을 위해 조직에서 개발한 최첨단 기술 중 하나인데, 아직 상용화가 되지 않아 아직까지는 체내에 IC칩을 이식하고 있는 SOS 요원끼리만 사용이 가능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지금 몇 시야, 세라···?”

에릭이라고 불린 금발머리 소년의 입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곧바로 그의 머릿속에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

「06시 정각입니다.」

“···아으으으···. 왜 또 이렇게 일찍 깨웠어···.”

소년은 아직 잠이 덜 깬 목소리로 투덜거리며 잠깐 손을 더듬거리더니, 상반신에 덮여있던 얇은 이불 끄트머리를 붙잡아 머리끝까지 덮어썼다.

그 바람에 펄럭, 하는 소리가 나며 먼지가 일었다.

공중에 날린 허연 먼지들이 창문에서 곧게 뻗어 들어오는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

「이제 그만 혼자서 일어날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에릭.」

“···으응···.”

“······.”

「에릭.」

“······.”

그러나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쓴 소년은 들려온 목소리에 반응하지 않고 점점 수마에 잠식되고 있었다.

마치 꿈결에 들려오는 것처럼, 그의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는 서서히 멀어지고 있었다.

결국 목소리의 주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최후의 수단을 꺼내들었다.

– 펄럭.

그 순간 소년의 전신을 덮고 있던 이불이 확 걷히며, 막 잠에 빠져들기 직전이던 소년은 또 다시 강렬한 햇살 아래 노출되었다.

눈부신 빛이 눈꺼풀을 뚫고 들어와 망막까지 전달되는 바람에 소년은 더 이상 수면을 취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게 되었다.

그는 달아나는 잠을 필사적으로 붙잡으려 노력해 보았지만 결국 부질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체념하며 천천히 눈꺼풀을 열었다.

반짝이는 사파이어같이 푸른빛을 띠는 소년의 눈동자가 서서히 드러났다.

눈을 게슴츠레 뜬 소년은 시야 한편에 들어온 움직임을 쫓아 푸른 눈동자를 서서히 굴렸다.

그의 시선이 마침내 도달한 곳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의 바로 옆에서 그에게서 빼앗은 이불을 묵묵히 반으로 접고 있는 검정색 정장차림의 은발머리 소녀였다.

그 소녀의 외모는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아름다웠다.

눈부신 은발과 조화를 이루는 창백하리만치 새하얀 피부.

도도한 고양이 같은 눈매, 루비 같은 붉은빛 눈동자.

곧게 뻗은 높은 콧대와 깎아내기라도 한 듯한 V라인의 턱선.

그런 그녀의 너무도 아름다운 외모에 걸맞게, 무심하게 닫혀있는 옅은 연분홍색 입술은 그녀의 도도한 눈매와 함께 어우러지며 아무 감정도 담겨있지 않은 듯한 차가운 무표정을 자아내고 있었다.

아직 완전히 소녀티를 다 벗지 못한 앳된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키가 165cm정도로 여자치고는 큰 편인 그녀는 늘씬한 몸매와 품위 있는 몸가짐으로 성숙미를 풍기는 여성 정장차림을 완벽하게 소화해내고 있었다.

등 뒤로 곧게 흘러내려 검정색 정장 재킷의 늘씬한 허리까지 닿고 있는 그녀의 기다란 은발 머리칼이 햇빛을 받아 은은하게 반짝였다.

그녀는 아직까지 침대에 어정쩡하게 누워 있는 금발머리 소년 ‘에릭’을 무감정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

「국장님께서 찾으십니다. 에릭.」

소녀가 내뱉은 그 말에 에릭은 흠칫 놀라며 눈을 번쩍 떴다.

“국장이 나를? 왜?”

그가 몸을 반쯤 일으키며 얼떨떨한 목소리로 묻자 소녀는 무덤덤한 어조로 대답했다.

“······.”

「저도 자세히는 모릅니다만, 긴히 할 말이 있으시다고.」

“···아, 또 뭐야. 귀찮게···.”

“······.”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5분 안에 준비 마치고 나오세요.」

“뭐? 5분 안에 준비를 어떻게 다 해? 어, 잠깐만, 세라···!”

에릭이 항변했지만 ‘세라’라는 이름의 소녀는 그의 말을 귓등으로도 들은 체 하지 않고 휙 등을 돌려 문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

「S. O. S. (Secrets from Old Secrets)」

그 이름은,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극비 국제 비밀조직의 암호명이다.

과거,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주요 연합국의 대표들은 앞으로 일어날 전쟁을 막고 국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1945년 10월 24일, 국제연합(UN, United Nations)을 창설했다.

하지만 머지않아 미국과 소련의 대립으로 전 세계에 냉전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고, 세계 평화를 유지한다는 명목 하에 설립된 UN은 강대국의 대립 사이에서 실질적인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유명무실해졌다.

당시 미국과 소련으로 갈라선 양측 진영의 지도자들은 언제 상대방이 먼저 핵미사일 발사 버튼을 눌러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공포에 떨며 하루하루를 살아갔고 그러한 분위기는 1950년에 발발한 한국 전쟁을 기점으로 극도로 치닫게 되었다.

사소한 도발 하나만으로도 곧바로 제 3차 세계대전이 발발할지도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

이러한 상황이 몇 년씩이나 지속되자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한 양측 지도자들은 이 상황을 타개할 해결책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양측 진영의 주축인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당시 직·간접적으로 이 침묵의 전쟁에 참전하고 있던 70여 개국의 정상이 한날한시에 중립국 스위스의 어느 지하 비밀시설에 모여 회담을 열자는 합의가 물밑에서 성립되었고, 이 비밀 회담은 어떠한 외부 언론에도 알려지지 않은 채 예정대로 극비리에 진행되었다.

이 회담에서 각국 지도자들은 냉전시대를 끝내기 위한 대책으로 지구상의 그 어떤 국가정부에도 소속되지 않으면서 여차할 경우 무엇보다 강력한 억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독자적인 국제기구를 설립하는 안을 채택하였다.

다만 이 국제기구는 국제 연합(UN)과는 달리 세계의 균형이 심각하게 무너져버릴 위험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상황에만 비로소 움직인다는 조건을 한정시켰고, 그 조건에 의해 이 조직의 활동 내용, 규모, 심지어는 조직의 존재 자체마저도 세간에는 철저하게 비밀로 부쳐지게 되었다.

초창기 SOS 조직의 지도부는 CIA와 MI6, 모사드 등의 세계 유명한 첩보기관의 국장 혹은 부국장들이 겸임하여 형성했고, 그 아래 구성원으로는 각국에서 가장 뛰어난 특수부대 혹은 정보기관 소속의 인간들을 선출해 그들을 정예로 활동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인원 충당에 한계가 오자 고아원이나 테러단체 등으로부터 부모 잃은 아이들을 데려다가 훈련을 시켜 SOS요원으로 키워내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런데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냉전시대가 종식되며, 처음엔 냉전시대를 끝낼 목적으로 설립되었던 이 국제기구는 해체될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SOS의 상부는 꼭 냉전 때문이 아니라도 세계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SOS같은 억제력을 가진 기구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쳤고, 위와 같은 주장이 완전히 받아들여지진 않았지만 여러 복합적인 이유로 인해 SOS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지 않고 무사히 존속할 수 있었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세계 최대 규모의 국제 비밀조직에 대한 반발과 우려의 목소리 또한 적지 않았다.

조직의 특성상 모든 정보가 베일에 싸여있는 데다가 소수의 정예 요원만으로도 지구상의 웬만한 정부조직 하나쯤은 간단하게 궤멸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조직인 만큼 이러한 힘을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사용하려는 반동분자세력에 대한 각국 지도자들로부터의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자, SOS 상부에서는 그에 따른 해결책으로 조직의 모든 활동정보를 필요시 제공하고, 규율 강화를 통해 조금이라도 규율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는 반동분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내리겠다는 성명을 각국 고위층 인사들에게 전달했다.

하지만 이는 그저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할 뿐, 실상은 SOS 조직의 지도부 외에는 그 누구도 알 방법이 없었다.

그러한 논란들을 현재진행형으로 끌어안은 채, SOS라는 비밀조직은 여러 번의 격변과 풍파 속에서 점점 더 비밀스럽고도 강력한 조직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

SOS 남아메리카 제7 극동지부, 국장실.

-벌컥!

“앗, 뜨거!”

갑자기 예고도 없이 문이 와락 열리자, 국장실 안에서 밀크티를 음미하고 있던 한 중년 남자가 화들짝 놀라 그의 손에 들고 있던 밀크티를 엎지르고는 비명을 질렀다.

“부르셨습니까, 국장님.”

그러나 정작 문을 열어젖힌 장본인, 에릭은 문 앞에 선 채 시큰둥한 표정으로 묻고 있었다.

“아··· 에릭, 또 너냐. 들어올 때 노크 좀 하고 들어오라고 내가 몇 번을···.”

구시렁대며 티슈로 자신의 손을 닦아내는 그는 에릭과 세라가 속한 지부의 최고 책임자, 세르게이 반 라트미어 국장이었다.

“부른 용건이나 말씀하시죠.”

에릭은 여전히 귀찮음이 넘쳐나는 태도로 말했다.

그의 뒤에선 세라가 대신 사과한다는 의미가 담긴 목례를 해왔다.

“일단 들어와 앉아라. 서서 할 이야기는 아니니.”

국장은 국장실 가운데에 놓인 소파를 가리키며 에릭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의 눈길 끝에서는 바꾼 지 얼마 되지 않은 검은색 소파의 가죽시트가 번들거렸다.

에릭은 잠시 국장을 쳐다보다가 이내 발걸음을 옮겨 국장이 가리킨 가죽소파에 허리를 내리고 앉았다.

에릭의 뒤를 따라 들어온 세라는 곧은 자세로 그의 뒤편에 섰다.

“간밤에 잠은 잘 잤나?”

“아뇨.”

“건강해 보이는 걸 보니 잘 잤나보군.”

에릭의 부정을 간단히 무시해버리고는 국장이 말을 이었다.

“최근에 아무런 임무도 주어지지 않아 심심하던 참이었지?”

“그렇다고 딱히 뭔가를 하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만.”

“하고 싶지 않아도 시키면 해야 하는 것이 우리 조직의 규율이지.”

– 스윽.

국장은 그렇게 말하며 에릭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

에릭이 종이를 받아들고 내용을 확인하자, 종이 상단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있었다.

[해외 임무 파견 동의서]

“···뭡니까, 이게?”

“찬찬히 잘 읽어보게. 아, 밀크 티 한 잔 하겠나?”

“괜찮습니다.”

에릭은 눈살을 찌푸리며 들고 있는 문서의 아랫부분으로 시선을 옮겼다.

라트미어 국장은 세라에게도 눈짓으로 차의 권유를 했지만 세라 또한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거절의사를 밝혔다.

“······.”

그런데 문서를 들여다보던 에릭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세라가 의아함을 느끼고 에릭이 들고 있는 종이를 그의 어깨너머로 슬쩍 엿보았다.

거기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있었다.

—————————————————–

임무 대상자: AX – 907, RA – 872

위 요원들은 해외 파견지역 (Republic of Korea)에서의 파견 임무 수행에 동의함.

.

.

.

—————————————————–

“···뭔 소립니까, 이게? 저보고 대한민국으로 가란 말입니까?”

에릭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국장을 향해 묻자, 국장이 어느 샌가 다시 탄 밀크티를 홀짝이고는 대답했다.

“알다시피 초급 요원은 실전에 투입되기 전에 충분한 실작전 수행 능력을 습득해야 한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이고도 기본적인 것이 잠입임무지. 잠입임무는 임무 수행 능력은 물론이고 임무 수행 도중 변수가 발생했을 경우에 문제없이 대응할 수 있는 순발력과 여차할 경우 자율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판단력 또한 요구된다. 따라서 이번 임무는 방금 말했던 사항들에 대한 훈련으로써 실제 작전과 동일하게 진행된다.”

“···예? 갑자기 그게 무슨-.”

“게다가 이번 파견지역인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교육열이 상위권에 들기로 유명한 나라이니, 이번 기회에 대한민국의 고등학교에 잠입해 기초 소양을 쌓는 것도 네 녀석의 미래를 위해 나쁘지 않겠지. 내일 오전 9시까지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도록. 공항까지 태워다 줄 리무진이 한 대 기다리고 있을 거다.”

국장은 에릭의 말을 자르고는 말을 마저 이었다.

“잠깐만··· 이제 와서 기초 훈련이라니, 그런 거 이미 예전에 받은 지 오래입니다.”

“흐음. 그래서 그걸 받은 녀석이 그런 무모한 짓을 저질렀던 거냐.”

“······.”

“너무 그렇게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진 마라. 이제 그 후로 시간이 충분히 경과하기도 했고, 지금쯤이면 네 녀석도 어느 정도는 반성하고 있을 거라고 판단해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니 말이다. 네 근신 처분은 오늘 부로 풀어주도록 하겠다. 다만 감시역은 아직까진 조금 더 두고 봐야겠지만.”

“···이제 와서 뭔···.”

“동의서 다 읽었으면 그 밑에 서명 칸 보이지? 거기에 서명하면 돼.”

그 말을 들은 에릭은 자신의 손에 들린, 자신을 먼 타국으로 보내버리는 것에 동의한다는 내용이 쓰여 있는 얇은 종이를 잠시 동안 뚫어져라 노려보다가, 하는 수 없이 테이블에 놓여있는 펜 꽂이에서 펜 하나를 뽑아들고 종이 아랫부분의 서명 칸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자, 세라. 여기.”

“······.”

「······.」

에릭이 종이와 펜을 뒤에 서 있는 세라에게 넘겨주자 세라는 군말 없이 무표정으로 그가 건네준 종이를 받아들고는 자신의 서명을 적어 넣었다.

“이번 임무를 무사히 마치면 네게 내려진 강등처분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검토해 보도록 하마. 그래도 한때는 엘리트라고 불렸던 네 녀석 아니냐.”

“···그 이야기는 됐습니다.”

에릭은 듣기 불편하다는 듯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국장의 말마따나 에릭이 한때 엘리트였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6년 전 요원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주위의 모두를 놀라게 했던 에릭은 곧바로 실전에 투입되고 나서도 뛰어난 작전수행능력과 타고난 직감으로 여러 중요한 작전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올렸다.

하지만 그는 어떠한 사건을 계기로 인해 징계를 받아 최하등급으로 강등되어 버렸다.

잠시 SOS의 계급에 대하여 간단히 설명하자면, SOS의 계급기준은 첫 알파벳을 기준으로 A부터 E까지 지상, F부터 J까지 해상, K부터 O까지 공중, P부터 T까지 지원병과로 분류되는데, 맨 처음 알파벳은 뒤의 배열순서일수록 그 계급이 높아지고, 두 번째 알파벳은 앞의 배열순서일수록 처음 알파벳에 속하는 병과에서의 순위가 높아진다.

예를 들자면 요원코드가 RA – 872인 세라의 계급은 지원 병과에서 P, Q보다 높은 R클래스 중에 가장 높은 A등급이다.

그리고 두 알파벳의 뒤에 붙는 세 자리의 숫자는 요원의 고유 식별번호인데 이것은 계급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덧붙이자면 요원코드가 AX – 907인 에릭의 계급은 지상 요원 중 최하위 등급에 속한다.

본래 지원병과를 제외한 다른 모든 전투병과의 요원들에게는 통상적으로 한 명 이상의 지원요원이 의무적으로 배치되는데, 요원학교라고 불리는 SOS산하 교육기관에 들어간 예비요원들은 2년 뒤 이 요원학교를 수료한 후에 자신의 병과를 결정하게 된다.

지원병과를 선택한 요원들은 처음엔 랜덤으로 그들이 서포팅 할 파트너가 결정되고, 2년 이상 근무하게 되면 다른 파트너로 교환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활동 자금은 세라를 통해 입금 될 거다. 임무 내용은 이 서류에 자세히 적혀있으니 돌아가서 읽어보도록 하고.”

“······.”

– 타악.

에릭은 말없이 국장이 넘겨준 갈색의 서류봉투를 받아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마중 나가마. 행운을 빈다.”

“필요 없습니다.”

– 콰앙!

에릭은 성큼성큼 걸어가 국장실 문을 세게 닫고 나가버렸다.

“참···. 저 녀석은 언제쯤 철이 들까.”

에릭이 거칠게 닫고 나간 문을 바라보며 국장이 혀를 차자, 아직 남아있던 세라가 말을 받았다.

“······.”

「본성이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만.」

“···호오. 가만 보면 세라 너도 무심한 척 하면서 저 녀석이 상당히 마음에 드나보구나.”

“······.”

「······.」

“···흠.”

세라가 묵묵부답으로 답하자, 라트미어 국장은 코로 짧게 숨을 내쉬며 검지로 안경을 치켜 올렸다.

블라인드가 쳐져있는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빛의 역광을 반사한 그의 안경알이 순간적으로 번쩍 빛났다.

“···세라.”

그리고 그는 낮은 목소리로 세라를 불렀다.

“물론 너도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어떠한 상황이 오더라도, 너의 본분을 잊지는 마라.”

“······.”

「···알고 있습니다.」

“그래. 이제 너도 그만 나가 보거라. 저 녀석이 허튼 짓 하지 못하게 잘 감시하도록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