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탁탁탁.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숙소를 나온 에릭은 근처 공원을 조깅하고 있었다.

에릭이 달리고 있는 코스는 지난 3년간 그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달려온 길이었다.

그가 ‘어떠한 사건’으로 인해 근신처분을 받게 된 이후로 어언 3년이 흘렀다.

그의 숙소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넓은 호수공원까지 이어져있는 그 코스는, 아무런 임무도 주어지지 않아 몸이 근질근질하던 에릭에게 있어서는 그나마 최적의 단련수단이었다.

“후우, 후우···.”

일정하게 호흡을 조절해가며 달리던 에릭은 그 스스로 정해놓은 코스의 끝에 다다르자 걸음을 천천히 늦추었다.

그의 눈에는 공원 중앙에 위치한 커다란 호수와 그 주위에 펼쳐진 넓고 푸른 잔디밭, 그리고 잔디밭 여기저기에 드문드문 설치된 기다란 나무벤치가 들어왔다.

이제는 하루일과가 되어버린 이 조깅을 내일부터는 할 수가 없어진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듦과 동시에, 지금 그의 눈에 비치는 모든 풍경을 새롭게 받아들이게 하고 있었다.

“···하아.”

잠시 멈춰 서서 숨고르기를 마친 그는 언제나 운동을 마치고 나면 드러누워 낮잠을 청하던 공원 한 편에 서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

그러나 그는 곧 언제나 그에게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주던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에 그의 눈에 익숙한 머리색을 가진 인물이 서 있음을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검은빛의 늘씬한 정장차림과 대조되는 눈부신 은발을 가진 한 소녀가 느티나무에 등을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서 있다가,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멈춰선 그녀의 파트너의 존재를 눈치 채고는 천천히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약하게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그녀의 기다란 은발 머리칼이 잠깐 동안 흩날리다가 곧 제자리를 찾았다.

“······.”

「오늘도 조깅입니까.」

“···세라.”

“······.”

「아침에는 그리도 안 일어나려 안간힘을 쓰는 인간이 왜 이런데서만 그렇게 쓸데없이 성실한 겁니까.」

– 휘익.

“······!”

– 탁.

세라가 말이 끝남과 동시에 던진 무언가를 에릭은 반사적으로 받아들었다.

한 박자 늦게 확인하니 그의 손에 투명한 생수병 하나가 들려있었다.

“···땡큐.”

에릭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세라를 잠시 바라보다가, 곧 세라가 건네준 생수병 뚜껑을 따고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그리고 단숨에 생수병의 물을 다 비운 에릭이 생수병 입구에서 입을 떼는 것을 확인한 세라는 말을 다시 시작했다.

“······.”

「임무 내용은 확인해 보셨습니까?」

“겨우 그거 확인하려고 일부러 여기까지 직접 온 거야?”

“······.”

「당신이 ‘겨우’라는 말로 치부해버린 그것이 적어도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조깅에 비해서는 우선순위가 훨씬 더 높은 일이라고 생각됩니다만.」

“······.”

세라의 정론에 할 말이 없어진 에릭은 아무 대답도 돌려주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

「당연히 임무 봉투는 뜯지도 않았겠죠.」

“···그건···.”

세라의 말대로 그는 국장에게서 받았던 임무봉투를 확인도 하지 않고 그의 숙소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나온 참이었다.

“······.”

「그래도 누군가는 열심히 작성한 문서일 텐데 한 번은 읽어보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 합니다만.」

– 스윽.

세라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품에서 갈색 봉투를 꺼내보였다.

“···어디서 났어, 그건?”

“······.”

「당신이 뜯지도 않은 채로 책상 위에 던져놨기에 제가 챙겨왔습니다.」

“내 방에 멋대로 들어갔어?”

“······.”

「이제 와서 뭘 새삼스럽게 따지는 겁니까.」

세라가 그렇게 말하며 에릭에게 봉투를 내밀자, 에릭은 잠시 멍하니 그녀 손에 들린 갈색 봉투를 쳐다보다가 곧 손을 뻗어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봉투에서 서류를 꺼내들자, 서류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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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무 확인서]

대상 요원: AX – 907, RA – 872

임무 내용: 작전지역 내 조건에 부합하는 위장근무 직책 수행

위장 직책: 고등학생

임무 기간: 미정

비고: 작전지역 내 가장 적합한 위치인 [한국 국제 고등학교]에 입학 후 고등학생으로 위장근무 수행. 작전 예산은 추후 통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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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

「저도 잘은 모릅니다만, 통상적으로 일반 사람들이 미성년이 어른이 되기 전에 거치는 마지막 교육과정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아··· 위장근무가 제일 싫은데···.”

“······.”

「······.」

에릭의 투덜거림에 세라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지만 딱히 그것에 대해 부정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녀 또한 에릭의 말에 어느 정도는 동의하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도 위장근무는 주위 환경과의 조화, 임무내용의 완벽한 숙지, 철저한 비밀 유지와 더불어 상황에 따른 적절한 대처능력 등이 필요한 고난도의 작전이다.

그 중에서도 요원의 정체가 민간인에게 탄로 나게 되면 해당 요원에게는 중징계 처분이 내려질 정도로, 보안유지는 위장근무 작전에서 최우선시 되는 중요사항이었다.

에릭은 과거에 몇 번 위장근무를 수행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정체를 들킬 위기에 처했었던 것이다.

웬만한 작전들은 뛰어난 성적으로 잘 수행해 나가던 에릭이 유일하게 최저 작전수행성적을 올렸던 것이 바로 위장근무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겉모습뿐만 아니라 성격까지 완전히 바꿔야 하는 위장근무는 에릭의 적성에는 맞지 않았다.

“하아···.”

에릭은 한숨을 내쉬며 서류를 다시 종이봉투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여전히 그를 무표정한 얼굴로 응시하고 있는 세라에게 말을 걸었다.

“넌 아무렇지도 않아?”

“······.”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 같은 놈의 지원요원이 된 거, 후회하지 않냐고. 나 때문에 저런 먼 곳까지 가게 되어버렸잖아. 애초에 너 정도 성적이면 얼마든지 더 나은 환경에서 근무할 수 있었을 텐데.”

“······.”

「제가 선택한 길입니다. 후회는 없습니다.」

“···그러냐.”

세라가 담담한 태도로 말을 받자 에릭은 임무서류가 든 봉투를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욱여넣고는, 느티나무 부근의 적당한 자리를 찾아 양손으로 뒤통수를 받치고 드러누웠다.

– 쏴아아아.

그때, 그의 측면 방향으로부터 불어오는 약간 강한 바람이 공원에 깔린 잔디를 순차적으로 훑으며 파도소리와 닮은 시원한 소리를 자아냈다.

그리고 그 바람이 에릭이 누워있는 자리를 스쳐지나갈 때, 그의 이마를 덮고 있던 금빛의 곱슬머리가 젖혀졌다.

드러난 그의 이마 왼쪽에 새겨진 희미하게 길쭉한 흉터가 언뜻 보였다.

“······.”

「······.」

그의 옆에 잠자코 서 있던 세라는 깊은 생각에 빠진 얼굴로 드러난 그의 이마에 새겨진 흉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응?”

“······.”

「······.」

그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시선을 느낀 에릭이 한쪽 눈을 뜨자, 세라는 곧바로 시선을 피해버렸다.

“세라. 그렇게 할 짓 없이 서성거리지 말고, 옆에 같이 눕던지 아님 먼저 돌아가던지 해.”

“······.”

「···국장님께서 에릭이 허튼 짓 하지 못하게 잘 감시하라고 하셨습니다. 저쪽 벤치에 앉아 기다리겠습니다.」

세라는 선언하듯 말하고는 에릭에게서 등을 돌리고 근처 벤치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든가.”

에릭은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듯이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세라의 등 뒤에 대고 중얼거리고는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

그 날 저녁, SOS 제7 극동지부 식당.

평범한 보험회사 건물로 위장한 제 7지부 건물의 지하 1층에 위치한 식당에는 저녁시간이 되자 임무를 마친 요원들이 하나둘씩 몰려들고 있었다.

그리고 에릭 또한 그들 중에 섞여서 식권을 뽑은 뒤, 얼마 뒤에 나온 핫도그 세트를 받아들고 테이블에 음식이 담긴 쟁반을 내려놓고 앉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 터억.

“여어, 에릭. 저 멀리 바다 건너 여행 떠난다며?”

“와, 부럽네. 나도 갈 수만 있으면 같이 가주고 싶은데?”

“······.”

막 핫도그에 손을 뻗으려던 에릭의 주위로 그의 동기 세 명이 그를 둘러싸더니 그에게 비아냥대기 시작했다.

에릭은 움직임을 멈추고는 눈동자를 굴려 그들을 노려보았다.

“아아, 에릭은 부럽다. 그리도 예쁜 세라하고 매일 딱 달라붙어있을 수 있어서.”

“사실은 둘이 벌써 한 거 아냐? 젠장, 너무 부럽···.”

– 콰당!

그 직후.

순식간에 의자를 박차고 일어난 에릭이 마지막 발언을 했던 사내의 멱살을 잡아 올리자, 멱살을 잡힌 사내의 발뒤꿈치가 공중에 들렸다.

“왜··· 왜? 한 대 치려고?”

거의 공중에 매달리다시피 에릭의 손에 의해 들어 올려 진 사내는 겁에 질렸음이 역력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계속해서 에릭을 도발해왔다.

어느새 조용해진 식당 내의 모든 이목은 에릭과 그 주위의 세 명의 사내들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뭐야, 지금 우리랑 해보자는 거냐?”

“이 자식, 예전부터 실력 좀 있다고 나대는 게 마음에 안 들었는데 잘 됐다! 이참에 한 번 붙어보자!”

서로 한 발짝도 물러설 수 없는 일촉즉발의 상황. 그 팽팽한 긴장감은 마치 가느다란 실 가닥을 양쪽에서 한계까지 잡아당기듯 언제라도 툭 끊어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렇게 몇 초가 흘렀을까.

– 탁.

갑자기 옆에서 뻗어 나온 새하얗고 가느다란 손이 에릭의 팔을 가볍게 붙잡았다.

에릭은 반사적으로 그 손의 주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

「······.」

그리고 돌아본 에릭의 눈동자에 비친 것은 다름 아닌 그의 파트너, 세라였다.

선명한 붉은 빛을 띠는 그녀의 눈동자가 그를 마주보고 있었다.

세라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보며 천천히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쳇.”

에릭이 하는 수 없이 상대의 멱살을 놓으며 혀를 차자, 상대 사내들도 잡고 있던 에릭의 옷깃을 얼떨결에 놓으며 한 발짝 물러섰다.

“가자. 세라.”

에릭이 몸을 돌려 그렇게 내뱉고는 식당 출입구로 걸어가기 시작하자, 세라 또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젠장, 세라가 내 지원요원이었어야 했는데···.”

에릭이 식당을 빠져나가기 직전, 뒤에서 그렇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는 그것을 무시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

“······.”

제 7극동지부 건물 옥상.

에릭은 난간에 기대어서서 밤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도시의 불빛들을 멍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 휘이잉.

고층 특유의 서늘한 바람이 그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직 해가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은 2월 중순.

남반구의 날씨는 이제 막 더위가 가시고 선선한 가을이 오고 있었다.

에릭이 지금 서 있는 건물 옥상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어떤 회사 건물의 커다란 건물 유리창으로는 아직 퇴근하지 못한 회사원들이 컴퓨터 앞에 앉아 작업하고 있는 모습들이 작게 보였다.

“······.”

「에릭.」

그때, 그의 뒤에서 한참을 말없이 서 있던 세라가 마침내 그의 이름을 불렀다.

“······.”

에릭은 그녀가 어떤 말을 해 올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십중팔구 아까 전 식당에서의 일에 대해서이리라.

에릭은 속으로 지레짐작을 하고는 그가 예상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내놓았다.

“그 놈들이 먼저 시비를 걸었어.”

“······.”

「······.」

변명의 색이 짙은 에릭의 말을 세라는 그저 침묵으로 받았다.

그녀 또한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에릭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저런 행동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가 에릭을 부른 이유는 아까 전 일의 시시비비를 따지려는 것이 아니었다.

“······.”

「규율에 어긋나는 행위는 최대한 자제하라고 당부 드렸을 텐데요.」

“글쎄. 나도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마음대로 되질 않네.”

여전히 먼 곳을 응시한 채로 무심하게 대꾸하는 에릭의 태도는 세라의 마음에 깃든 가책을 조금이나마 덜어주었다.

사실 에릭이 저런 식으로 시비가 붙은 적은 이번 한 번 뿐만이 아니었다.

아까 전 에릭에게 멱살을 잡혔던 사내의 이름은 존 페리.

그는 에릭이 요원학교를 졸업할 당시 본래라면 수석이 되었어야 했던 인재였다.

하지만 에릭이 그를 월등한 성적으로 뛰어넘어버리며 존 페리는 차석으로 강등되어 버렸고, 그 일로 인해서 그는 에릭에게 심한 열등감을 품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에릭 본인은 그에 대해 무심한 태도로 일관했고, 그런 그의 태도는 이런 종류의 마찰을 더더욱 심화시켰다.

방금 전과 같은 시비가 그 대표적인 예였다.

“······.”

「굳이 저런 인간들을 하나하나 상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에릭. 그러다가 또 다시 징계라도 받으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알겠어. 앞으로는 주의할게.”

‘앞으로’ 라는 막연한 단어에 기약을 담아 말해오는 에릭의 쓸쓸해 보이는 뒷모습을 잠시 동안 응시하다가, 세라는 이내 등을 돌리고는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

「내일은 해외파견 당일입니다. 오늘밤은 일찍 자도록 하세요.」

“그래.”

– 또각또각.

에릭의 대답을 들은 세라는 발걸음을 옮겨 옥상 출입구로 향했다.

에릭은 곁눈질로 세라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흘끗 살펴보다가, 이윽고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화려한 밤 도시의 풍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에게 있어서는 3년 만에 받은 새 임무.

게다가 이번 임무는 세라가 그의 지원요원으로 실전배치를 받은 이후로 맡은 첫 임무였다.

에릭이 근신처분을 받은 탓에 그의 파트너인 세라마저도 아무런 임무도 내려 받지 못했고 그 상태로 벌써 1년 이상이 흘렀다.

에릭 자신도 자신이었지만 그는 세라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과연 실전경험도 없고 말도 못 하는 그녀가 임무를 탈 없이 수행해낼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마, 아니 반드시, 그녀는 잘 해낼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이기 때문에.

그렇게 밤이 깊어가는 것도 모른 채, 그 후로도 에릭은 한참동안이나 옥상 난간에 기댄 채 사색에 잠겨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