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아침.

어째서인지 에릭은 평소 기상시각보다 조금 이른 시각에 눈이 떠졌다.

잠시 동안 멍한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보던 그는, 곧 오늘이 무슨 날인지 떠올려냈다.

이제 몇 시간 후면 그가 약 3년이라는 기간 동안 아무런 의욕 없이 지내왔던 이 칙칙한 방을 떠나 낯선 장소에 도착하게 될 것이었다.

어차피 이런 답답한 장소에 미련 따위는 남아있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새로운 장소에 대한 기대나 희망 따위를 품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3년이라는 긴 공백 기간은 그에게 의욕상실과 무기력함이라는 후유증만 남겼다.

“흐아아아···.”

에릭은 상체를 쭉 뻗으며 크게 한 번 기지개를 켜고는, 천천히 몸을 회전시킨 뒤 침대에서 다리를 내려 슬리퍼를 신고 일어섰다.

그런 다음 벽에 걸린 시계에 눈길을 주자, 시곗바늘들은 5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평소 기상시각보다 10분 정도 이른 시각이었다.

그때, 에릭의 머릿속에 문득 어떠한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세라에게 장난이나 한 번 쳐 볼까.

그 생각이 떠오른 직후 에릭은 곧바로 행동을 개시했다.

.

.

.

– 삐비비빅. 삐비비빅. 삐비비빅.

곧 6시 정각이 되자, 그의 방 어딘가에서 규칙적인 전자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 너머 복도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곧 방문이 열렸다.

– 벌컥.

그러나 평소와 다른 방의 모습에, 발걸음 소리는 문 밖에 멈춰 섰다.

깔끔하게 정리된 침구류, 걷혀져 있는 커튼으로 새어 들어오는 이른 아침의 밝은 햇빛.

그리고···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그녀의 파트너.

예기치 못한 사태에 그녀는 잠시 상황을 파악하려 방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머지않아 조금 열려져있는 구석의 옷장 문에 시선이 멈추었다.

십중팔구 에릭이 무언가 꾸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세라는 곧장 옷장을 향해 걸어가 옷장 문을 열어젖혔다.

– 덜컹!

그런데 세라가 옷장 문을 엶과 동시에, 옷장 문 위에 비스듬히 걸쳐져있던 오리털로 속이 채워진 베개가 그녀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 퍽.

그리고 미처 피하지 못한 세라의 머리에 베개가 정통으로 명중하자, 베개가 터지며 안에 있던 오리털들이 온통 세라를 덮어버렸다.

아직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상황파악이 덜 된 세라의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

「······.」

그녀가 자신에게 벌어진 상황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세라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자,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에릭이 그제야 침대 밑에서 슬금슬금 기어 나오고 있었다.

“아···그게, 있잖아, 세라. 이게 원래는 베개를 떨어뜨리기만 하려고 했던 건데 그게 설마 터질 줄은···.”

“······.”

「···그래서요?」

시선을 피하며 쭈뼛쭈뼛 변명하는 에릭에게 세라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돌려주었지만, 그녀의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는 것은 아무리 눈치가 없는 에릭이라도 알 수 있었다.

똑바로 에릭을 마주보는 세라의 눈앞으로 그녀의 머리 위에 얹혀있던 오리털 하나가 살랑살랑 떨어져 내렸다.

“미안.”

에릭은 솔직하게 사과했다.

어떠한 변명을 하더라도 세라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

「···하아···. 어서 가서 씻고 오세요. 출발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세라는 한숨을 내쉬며 에릭에게서 시선을 돌리고는 그녀의 상체를 뒤덮은 새하얀 깃털들을 손으로 툭툭 털어내기 시작했다.

“···도와줄까?”

“······.”

「어서 가서 씻고 오라고 말했을 텐데요.」

“···응.”

세라의 눈빛에서 순간 한기를 느낀 에릭은 곧바로 그녀의 말을 따라 방을 나갔다.

******

오전 9시.

– 드르르륵.

개인 짐을 전부 담은 캐리어를 끌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에릭은 먼저 나와 1층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던 세라를 발견했다.

에릭이 끄는 캐리어 바퀴소리에 세라가 그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리고 에릭이 마침내 그녀 앞까지 도달하자, 세라가 말해왔다.

“······.”

「9시에 출발이라고 그렇게 당부를 했었는데 9시에 나오면 어떡합니까.」

“미안. 짐 싸는 게 좀 오래 걸렸어.”

“······.”

「당신이 쌀 짐이 어디 있다고 이렇게 오래 걸린 겁니까?」

“뭐, 이것저것···.”

“······.”

「···일단 밖으로 나가도록 하죠. 벌써 국장님께서 나와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겠어.”

잠시 후 그들이 건물 1층 현관을 빠져나가자 조금 떨어진 도로변에 국장이 나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국장의 뒤로는 검은색 리무진 한 대가 시동을 건 채 멈춰서 있었다.

에릭과 세라가 건물 입구 계단을 다 내려오자 출입을 관리하는 경비로 위장한 요원 둘이 지나가는 그들을 향해 경례를 해왔다.

“기다리고 있었다. 짐은 다 챙겼나?”

국장이 에릭에게 말을 걸어왔다.

에릭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는 국장을 스쳐지나가 운전기사가 열어준 차 뒷문으로 캐리어를 밀어 넣으려했다.

“잠깐.”

그런데 그 순간, 국장이 에릭의 팔목을 붙잡았다.

“···왜 그러십니까?”

“짐은 저쪽이네.”

인상을 찌푸린 에릭이 국장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얼마 떨어지지 않은 뒤편에 검은색 밴 한 대가 비상등을 켠 채 대기하고 있었다.

“제가 들고 탈 겁니다. 어차피 여기도 자리는 충분히 넓으니까-.”

“원래 해외파견을 나갈 때는 모든 짐을 짐칸에 부쳐야 한다고 규정에 쓰여 있다. 네가 그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

국장의 말에 반박할 말을 잃은 에릭은 입을 다물었다.

“이제 이의는 없겠지. 이봐, 이걸 저쪽에 갖다 실어.”

“예!”

국장이 그의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호원 한 명에게 명령하자 그는 에릭의 캐리어를 뺏다시피 낚아채더니 뒤쪽의 밴을 향해 들고 가기 시작했다.

“필요한 장비들은 대부분 저쪽에서 지원해 줄 거다. 세라한테 미리 일러두었으니 가면서 자세한 설명을 듣도록 해라.”

“······.”

“······.”

「국장님. 비행기 시간이 2시간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슬슬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아, 그래. 세라, 너 먼저 차에 타 있어라. 이 녀석에게 아직 할 말이 조금 남아서 말이야. 금방 끝날 거야.”

“······.”

「알겠습니다.」

– 탁.

국장의 말에 세라는 열려있던 리무진의 뒷문으로 탑승하고는 차문을 닫았다.

그리고 도로변에는 국장과 에릭, 둘만이 남겨지게 되었다.

“그래서, 할 말이라는 게 뭡니까.”

에릭이 시큰둥한 얼굴로 국장에게 물었다.

그는 국장이 당연히 방금 빼앗은 그의 짐에 대해서 한 소리 하려는 줄로만 알았다.

에릭은 각종 무기를 포함한 그의 장비들을 캐리어 가방 안에 때려 박아둔 것이었다.

그러나 국장의 입에서 나온 말은 에릭의 예상을 한참 벗어났다.

“명심해라. 에릭. 이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예?”

“이만 가 보거라. 세라가 기다린다.”

“······.”

– 툭.

국장은 멍하니 서 있는 에릭의 등을 두드려 리무진 쪽으로 밀쳤다.

그러자 등을 떠밀린 에릭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얼떨결에 리무진 뒷문을 열고 차에 탑승했다.

– 부우우웅.

그가 리무진에 탑승하자, 리무진은 곧 출발했다.

고급차의 부드러운 엔진 음이 차내에 울려 퍼졌다.

“······.”

「국장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별거 아냐.”

“······.”

「그렇습니까.」

에릭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자, 세라도 별로 깊게 파고들 생각은 없었는지 더 이상 질문해 오지 않았다.

에릭은 손으로 앞머리를 한 번 훑듯이 쓸어 넘기고는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시선을 향했다.

리무진 차창 밖으로는 그가 3년간 지냈던 거리의 활기찬 풍경이 빠르게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곧 리무진이 사거리의 신호등에 걸려 멈춰 서자, 막 횡단신호로 바뀐 건널목을 건너기 시작한 수많은 양복 입은 직장인들과 그 외 다양한 사람들이 리무진 주위를 스쳐지나갔다.

에릭은 지나쳐가는 사람들의 얼굴들을 멍한 눈으로 응시하며,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방금 전 국장이 그에게 했던 말.

전혀 그 의도를 짐작할 수 없는 그 아리송한 말에, 에릭은 찝찝한 기분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가 아는 라트미어 국장은 현실주의자였다.

더구나 그는 결코 농담 삼아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지껄일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에릭이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도무지 짚이는 것이 없었다.

“······.”

「에릭.」

그때, 세라가 에릭의 이름을 불렀다.

“···응?”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겨있던 에릭은 슬그머니 세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스윽.

그러자 세라는 말없이 A4 크기만 한 갈색 서류봉투 하나를 그에게 내밀었다.

안에 뭐가 들었는지 겉으로 봐선 알 수 없었지만, 봉투 아랫부분이 조금 부풀어 있는 것이 무언가 종이 이외의 것이 들어가 있는 듯 했다.

“······.”

「한국에서 사용할 핸드폰과 신분증, 그리고 국제 여권입니다. 꺼내서 한 번 확인해 보세요.」

“······.”

에릭은 봉투에 손을 집어넣고 내용물을 꺼내 확인해보았다.

그 물품들은 다음과 같았다.

한국 회사의 로고가 찍혀있는 최신 스마트폰, 미합중국의 마크가 찍혀있는 여권, 그가 가게 될 학교의 학생증, CIA 요원증, 그리고 평범해 보이는 검은색 접이식 가죽지갑.

“······.”

「이중 위장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응···. 알고 있지.”

에릭은 영혼 없이 대답하며 지갑을 펼쳐 학생증을 꽂아 넣고 지갑을 다시 접은 다음, 그것을 여권과 겹쳐 왼쪽 바지 주머니에, 스마트폰은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는 CIA 요원증을 정장 재킷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

「그렇게 넣어두면 나중에 빠지지 않을까요.」

“걱정 마. 지금까지 그런 적 한 번도 없어.”

“······.”

「이번이 그 처음이 될 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

“···알았어. 알았다고.”

세라의 끈질긴 설교에 이기지 못한 에릭은 결국 안주머니 지퍼를 끝까지 채워 올렸다.

세라는 에릭이 지퍼를 끝까지 올리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

「이중위장이라고는 해도 위장 신분이라는 것을 절대 들키면 안 됩니다. 에릭.」

“내가 그 정도도 모를까봐?”

“······.”

「혹시나 해서 말해두는 겁니다.」

“참, 걱정도 팔자네···.”

세라가 그토록 당부하는 이중위장에 대해 에릭 또한 어느 정도 숙지하고 있었다.

그가 과거 요원학교 시절 첩보과목시간에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것들이었다.

SOS의 첩보작전 시 이중위장은 기본 베이스였다.

만약 첩보작전을 수행중이라는 사실이 민간인에게 발각되더라도, SOS의 존재에 대해서는 노출시키지 않도록 이미 세간에 알려진 다른 첩보기관의 이름을 빌리는 것이다.

SOS에서 이중위장을 할 때에는 해당 첩보기관에 통보가 되어 요원 개인의 신분이 실제로 해당 기관에 등록이 되는데, 이 과정은 세계의 유명한 각종 첩보기관 상부에 이미 SOS의 손길이 뻗쳐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1차 위장신분은 단순히 최후의 보루일 뿐이고, 그 신분이 발각되는 순간 작전은 즉각 전면 중지된다.

이 시스템에 의해 SOS의 정체가 세간에 직접적으로 발각되는 일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이었다.

“그나저나 이번에도 또 CIA야···. 안 좋은 기억이 있는데···.”

“······.”

「······.」

에릭의 혼잣말을 들은 세라는 묵묵부답했다.

그 뒤로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둘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

국제공항.

에릭과 세라는 출국심사를 받기 위해 세관 앞에 늘어선 긴 행렬에 끼어 기다리고 서 있었다.

아직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국제공항 내에는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뭔데 이렇게 사람이 많아?”

“······.”

「아직 휴가철이니까요.」

서류가방을 들고 바쁘게 어딘가로 뛰어가는 비즈니스맨들, 아이와 함께 손을 잡고 행복한 얼굴로 걸어가는 가족들, 단체 광관을 온 외국인들···. 그 외 다양한 사람들이 에릭과 세라의 주위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개중에는 종종 사이가 좋아 보이는 연인들도 끼어 있었는데, 그들은 서로의 손을 맞잡고 또는 팔짱을 낀 채로 자신들의 사랑을 과시하고 있었다.

가끔 멈춰 서서 포옹을 하거나 키스를 하는 연인들도 더러 있었다.

“세라.”

한 연인이 진한 포옹을 나누는 장면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던 에릭이 시선을 향하지 않은 채로 세라를 불렀다.

“······.”

「무슨 일이십니까.」

“우리도 다른 사람 눈에는 연인으로 보일까?”

“······.”

「···네?」

뜬금없는 에릭의 말에, 세라는 자기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되묻고 있었다.

“···그냥 해 본 소리야. 신경 쓰지 마.”

“······.”

「······.」

여전히 정면을 향한 채 중얼거리는 에릭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세라는 그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아무런 감정 없이 저런 말을 던진다는 것은 세라도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가볍게 던진 말 한 마디가 그녀의 기분을 흔들어놓고 있다는 것은 그녀로서는 별로 달가운 기분은 아니었다.

“그나저나 줄 한 번 더럽게 기네. 우리 비행기 탈 수는 있는 거야?”

“······.”

「누가 조금만 더 빨리 나왔었어도 이렇게 시간이 촉박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지금 나 말하는 거야? 아니, 그거 조금 빨리 나왔다고 얼마나 달라졌을···.”

– 타앙!

에릭이 말을 하는 도중 갑자기 공항 내부에 커다란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순간, 대화를 하던 둘은 반사적으로 총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