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쾅!

“똑바로 말 안 해? 네 녀석, 대체 정체가 뭐야!?”

공항 내부 경찰서의 어느 취조실.

성난 얼굴의 나이든 남자 형사가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에릭에게 고함을 쳤다.

그러나 그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에릭은 시종일관 묵비권을 행사하며 지겹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무슨 말이라도 좀 해라, 이 자식아! 그래야 내가 뭘 도와주던가 하지. 신변 조회도 불응하고, 질문에 대답도 안 하고, 그러고 있으면 뭐가 해결될 줄 알아? 아니면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냐?”

“······.”

에릭은 순간 안주머니에 넣어둔 CIA요원증이 떠올랐지만, 이내 그 생각을 떨쳐냈다.

아직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도 잘 알지 못하는데 괜히 섣불리 행동했다간 일이 더 꼬여버릴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그는 만약 자신이 이대로 계속 묵비권을 행사한다고 해도, 어차피 공식적인 정부조직에 속하는 경찰 말단의 일개 형사로서는 용의자에게 구체적인 범행증거가 있지 않은 한, 무죄 추정의 원칙에 의해 강압적으로 무언가 해 올 권한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보다 지금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세라에 대한 걱정이었다.

그녀 또한 십중팔구 에릭처럼 어딘가에서 따로 취조를 받고 있을 터인데, 물론 당연하게도 그녀 스스로 신변을 밝히는 큰 리스크를 짊어지는 행동을 할 리는 결코 없었기 때문에 그 사항은 별로 신경 쓸 요소가 아니었다.

다만 에릭이 두려워하는 것은 오로지 이 상황이 종료된 후에 불어 닥칠 후폭풍이었다.

아까 전 세라가 그를 보던 차가운 눈빛이 아직까지도 그의 뇌리에서 잊히지가 않았다.

그녀의 그런 표정으로 보아, 그가 다시 그녀를 마주했을 땐 엄청나게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임이 분명했다.

“자, 네 눈으로 똑똑히 봐라.”

형사는 그의 앞에 놓여있던 노트북을 에릭이 볼 수 있게 회전시켰다.

“여기, 범인 앞에 서 있는 것이 네 녀석 맞지? 이걸 보고도 계속 발뺌할거냐? 머리색이나 옷차림으로만 봐도, 어디서 어떻게 봐도 네 녀석이잖아!”

그리고는 노트북 화면에 표시된 CCTV화면에 찍힌 에릭의 모습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다시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형사의 손가락이 키보드의 스페이스 바 버튼을 탁 누르자, 영상이 재생되며 아까 있었던 일이 그대로 리플레이 되었다.

영상에는 에릭의 활약상이 처음부터 끝까지 빠짐없이 녹화되어 있었다.

– 탁!

이윽고 영상에 경찰이 등장하며 사건이 마무리되자 형사는 다시 한 번 스페이스 바를 눌러 화면을 정지시켰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인간이 날아오는 총알을 바로 앞에서 피한다는 것은 말이 안 돼. 당장 이 미스터리를 네 입으로 설명하지 않는다면, 너 또한 인질협박범의 공범으로 감방에 처넣을 거다. 만약 범인과 네가 일부러 미끼가 되어 사람들의 주의를 돌리는 동안 제삼의 공범이 무언가 다른 목적을 이루려고 연극을 한 거라면 모든 것이 다 설명이 되니까.”

설명이 되기는 개뿔.

그래도 모순투성이인 것은 마찬가지잖아.

자신의 완벽한 추리에 감탄한 듯 흡족한 표정을 짓고 있는 눈앞의 나이든 형사를 향해 에릭은 당장이라도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아무래도 이 형사는 세라가 붙잡은 또 다른 공범의 존재에 대해 아직 전해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이미 알고 있음에도 그와 세라를 그들과 한통속이라고 의심하면서 거짓말을 내뱉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것보다, 에릭의 미간을 절로 찌푸리게 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있었다.

어디서 어떻게 보아도 이 형사의 수사방식은 잘못되어 있었다.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어 있었다.

물론 이 형사의 추리는 엉터리긴 했지만, 때로는 저런 추리가 수사에 도움이 되는 경우도 더러 있다.

근거 있는 추리 또한 수사의 일부분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눈앞의 형사는 지금 확실한 용의도 없는 에릭을 그저 묵비권을 행사한다는 이유만으로 밑도 끝도 없이 협박하고 있었다.

이 형사가 지금 에릭에게 사용하고 있는 방식은 어디서 어떻게 봐도 강압수사 그 자체였다.

법치국가에서 용의자가 유죄라고 판결이 확정나기 전까진 무죄로 인정한다는 무죄 추정의 원칙에 위배되는 사항인 것이다.

어딘가의 범죄영화로부터 튀어나온 부패형사의 대표적인 표본 같은 이런 양반이 어떻게 형사가 된 건지 의문마저 들기 시작했다.

“뭐, 말하기 싫다면 하는 수 없지. 네 녀석이 끝까지 대답을 않겠다면, 나로서는 네 녀석을 공항테러의 공범으로 잡아넣을 수밖에. 물론, 지금이라도 입을 연다면 특별히···”

– ♪♬~

그런데 그때, 타이밍 좋게(아니, 어쩌면 나쁘게) 형사의 전화기가 울리며 그의 말을 끊었다.

형사는 인상을 찌푸리며 핸드폰 화면으로 시선을 흘끗 향했다가, 화면에 표시되고 있는 번호를 확인하고는 화들짝 놀라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예, 청장님! 특수수사 2팀 제임스 형사입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 아, 예. 그 녀석이라면 지금 제가 조사 중입니다. ······ 예··· 예?”

통화를 하던 형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에릭에게 시선을 향하다가, 다시 전화기에 대고 물었다.

“지금 당장 말입니까? 아니, 그래도······.”

복잡한 표정으로 말을 멈춘 형사는 잠깐 뜸을 들이다가, 납득이 가지 않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 네. 네···. 그렇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고생하십쇼.”

그리고 형사는 통화가 종료된 핸드폰을 천천히 귀에서 떼며 에릭을 노려보았다.

“···청장님의 직접 지시가 내려왔다···. 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네 녀석을 풀어주라는군.”

에릭에게 그렇게 통보하면서도 형사는 심히 못마땅한 눈치였다.

마치 다 잡은 사냥감을 다른 강자에게 빼앗겨버린 맹수마냥.

그러나 이미 내려진 경찰청장의 직속명령을 어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형사는 구겨지는 자존심을 애써 외면하며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에릭에게 나가라는 손짓만을 보냈다.

– 드르륵.

그 말을 들은 에릭은 의자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는, 취조실 문으로 걸어갔다.

– 달칵.

그런데, 에릭이 문손잡이를 돌리는 그 순간.

“어이, 애송이.”

그의 등 뒤에서 형사의 그런 낮은 읊조림이 들려왔다.

에릭은 문손잡이를 돌리던 손을 멈추고 얼굴을 반쯤 돌려 형사를 곁눈질로 돌아보았다.

“난 말이야. 너 같은 금수저 놈들이 제일 마음에 안 들어. 너희 같은 놈들은 범죄는 범죄대로 마음껏 다 저질러놓고는, 막상 붙잡아 처벌을 하려 하면 빽을 써서 미꾸라지처럼 스르르 빠져나가 버리지. 네 아버지가 어디 부서의 장관인지, 아니면 어딘가의 잘 나가는 국회의원인지는 잘 모르겠다만, 부모 빽만 믿고 그렇게 멋대로 설치고 다니다간 언제 한 번 큰코다치게 될 거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에릭은 피식 웃으며 대답을 돌려주었다.

“미안하지만, 내겐 부모가 없어.”

“··· 뭐?”

– 끼이익.

에릭은 그 말을 내뱉고는 문을 밀어 열었다.

“아, 그리고.”

문을 반쯤 연 에릭은 등 뒤로 마지막 말을 던졌다.

“조금 오해가 있는 것 같아서 말해두는데, 난 당신이 말하는 금수저 같은 게 아냐. 나도 그런 녀석들은 별로 마음에 안 들어.”

– 탁.

그 말을 끝으로, 에릭은 벙 찐 얼굴을 하고 있는 형사를 뒤로 한 채 취조실을 빠져나갔다.

******

“아···! 청년!”

에릭이 취조실에서 나와 경찰서 로비로 걸어가자, 중년의 한 여자가 로비 의자에 앉아 있다가 그를 발견하고는 벌떡 일어나 그에게 다가왔다.

“······?”

에릭은 잠시 동안 그에게 접근한 여성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다가, 이윽고 그녀가 누구인지 간신히 떠올려냈다.

아까 전 인질로 잡혔던 여성의 어머니였다.

그 동안 저쪽에서 인질로 잡혔던 여자도 이쪽으로 걸어와 그녀의 어머니 곁에 섰다.

“갑자기 취조실로 끌려 들어가기에 놀랐어요, 청년. 당신이 제 딸의 목숨을 구해주었다고 몇 번이고 호소해 보았지만, 아무리 말해도 제대로 들어주질 않아서요. 아, 그러고 보니 아직 이름이나 연락처 같은 것을 하나도 물어보지 못했는데 혹시 연락처라도 좀 알려줄 수 있나요? 이대로 보내긴 너무 고마워서, 나중에라도 꼭 보답하고 싶어요.”

인질의 어머니는 에릭의 손을 붙들고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말해왔다.

그리고 인질로 잡혔던 여자 또한 그에게 깊이 머리를 숙여왔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는 말과 함께.

진심이 어린 모녀의 감사인사를 받은 에릭은 순간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졌다.

그의 딴에는 그저 알량한 정의감으로 저지른 행동이, 누군가에게는 이렇게까지 큰 영향을 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에릭은 인질의 어머니에게 붙들어진 자신의 손을 복잡한 마음으로 내려다보다가, 이윽고 입술을 떼었다.

“유감이지만, 내가 핸드폰이 없어서.”

“아···. 그러면 계좌번호라도 좀···.”

“아니, 괜찮아요.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됩니다. 뭔가를 바라고 한 행동은 아니니까. 그냥 내가 멋대로 한 짓일 뿐이고.”

“그래도···.”

“진짜 괜찮아요. 미안하지만, 이제 가봐야 해서. 날 기다리는 사람이 있거든.”

에릭은 그렇게 말하고는 도망치듯 중년 여성의 손을 슬며시 떼어놓은 뒤 경찰서 출입구 쪽으로 몸을 틀었다.

“아아···! 청년, 그럼 이름이라도 좀 알려주고 가요!”

에릭이 멀어지자, 인질의 어머니는 다급한 목소리로 그에게 외쳤다.

“······.”

그러자 에릭은 경찰서 출입구 손잡이를 밀려던 손을 멈칫하고,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에릭. 내 이름입니다.”

그렇게 짧게 한 마디 던지고는, 그는 경찰서 출입문을 밀었다.

******

– 퍼엉!

그런데 에릭이 경찰서 문을 열고 나온 그때,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터지는 눈부신 섬광이 그의 시야를 하얗게 물들였다.

에릭은 순간 한 손을 들어 자신의 눈을 가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많은 인파, 빙 둘러 세워져 있는 카메라들.

그 모든 시선의 끝은 방금 경찰서에서 나온 에릭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에릭은 직감적으로 그가 지금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처했는지 인지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여기저기서 마구 날아드는 질문들이 그것을 확정 시켜주었다.

“인질극을 벌인 범인을 제압하신 것이 본인 맞습니까?”

“총알을 피하셨다는 증언이 나왔는데, 사실입니까?”

“그 자리에 있던 은발 여성은 어디로 간 겁니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

정신없이 날아드는 질문공세에 말문이 막힌 에릭은 멍한 표정으로 그저 눈동자만을 굴려 자신에게 향하고 있는 수많은 카메라들과 마이크들을 쳐다보았다.

사실 앞의 두 질문은 그렇다 쳐도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은 오히려 에릭이 묻고 싶은 것이었다.

세라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물론 지금 그의 귀에 꽂혀있는 초소형 무전기를 사용하면 그녀에게 무선통신을 보낼 수 있겠지만, 만약 여기서 그런 행동을 했다가는 그를 둘러싸고 있는 관중들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하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그러나 그의 예상보다 더 빨리, 세라에게서 온 통신이 그의 머릿속에 울렸다.

“······.”

「두 눈 꽉 감으십시오, 에릭.」

“······!”

대체 무슨 영문 모를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에릭은 그의 파트너가 지시하는 대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직후였다.

두 눈을 꽉 감았음에도 불구하고 다 막아지지 않은 강렬한 섬광이 그의 눈꺼풀을 투과해 그의 망막에 붉은 빛을 전달했다.

그는 마치 중천에 떠 있는 태양을 눈을 감고 관찰하는 것과 흡사한 느낌을 받았다.

– 탁.

그때, 누군가가 그의 손을 붙들었다.

누군지는 생각할 것도 없었다.

조금 차갑다고 느껴지는 가녀리고 부드러운 손이 그를 어딘가로 잡아당겼다.

그 손에 이끌려, 에릭은 그저 몸을 맡긴 채 사람들 틈을 헤치며 어디론가 끌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