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한 상혁과 당황한 혁찬.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정적을 깬 건, 팀 내 프로그래머의 작업상황을 확인하겠다며 자리를 옮겼던 민준의 웃음소리였다.

“풉, 푸훕!! 푸하하하하!!”

“민준아!!”

“아니, 크, 크큭···. 쟤 하는 말이 어째 많이···풉···들어본 거 같지 않냐?”

민준의 말을 들은 상혁의 얼굴이 귀까지 빨개졌다.

그리고 왜 자신이 열 받았는지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뭔가 하는 말마다 열 받는다 싶었더니 이 새끼 하는 말이 다 내 흑역사 시절 어록이었어.’

즐기면서 하자.

배우는 과정이니까 괜찮다.

게임을 즐기는 마음이 게임 제작에 대해 공부하는 것보다 중요하다.

상혁 자신도 회귀 전 고교 시절에 혁찬과 비슷한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것이 잘못되어있는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상혁은 한숨을 쉬며 혁찬을 쇼파에 앉혔다.

게임을 좋아하는 마음만 가지고 게임 제작에 뛰어들면 저런 마인드가 되는 게 보통이니까.

게다가 1998년을 기준으로, 프로그래머는 학원이라도 있었지만 게임 기획은 배울 방법이 극히 제한적이었다.

학원은커녕 관련 서적을 구하는 것도 힘든 시기였기에.

그렇다고 관련 커뮤니티가 많은 것도 아니고.

정작 상혁 본인도 기획에 대해서는 업계에 취직해서 맨땅에 헤딩하며 공부한 타입이었기에 혁찬이 지금의 상태가 된 이유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마음으로, 상혁은 혁찬을 가이드 하기로 마음먹었다.

적어도 무지는 죄가 아니니까.

“후···.혁찬아. 간단하게 예를 들어 설명해줄게. 어떤 사람이 피아노 소리를 정말 좋아해서 피아노 곡만 수천 곡 듣는다고 해서 피아니스트가 될 수 있어?”

“어···. 어렵죠.”

“그럼 뭘 해야 할까?”

“일단···.피아노를 치는 거요?”

“맞아.”

게이머는 게임을 플레이하고 게임 개발자는 게임을 제작한다.

둘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서로 배울 수 있는 점이 완전히 달랐다.

“물론 열정과 마음은 중요하지. 그리고 즐겁게 개발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고. 그래도 제일 중요한 건, 그 게임이 좋던 구리던 일단 만들어야 한다는 거야.”

어느새 민준이 지도해주던 프로그래머 여학생을 포함하여 혁찬과 민준, 그리고 서연이 상혁을 둘러싸고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아까 익스트림 발리볼 같은 게임은 가볍고 간단해서 만들고 싶지 않다고 했지? 너라면 2개는 만들었을 거라고 말이야. 그런데 게임의 가치가 규모에서 오나? 그럼 갤러그랑 테트리스는 만들기 쉬운 게임이야?”

“그건 그 시대에는 만들기 어려운 게임들이었잖아요.”

“그럼 시대 말고 너희 능력을 보면 어떤데? 너희는 그런 가벼운 게임이라도 만들 준비와 능력을 갖추고 있어?”

혁찬은 대답하지 못했다. 핑계를 대려면 댈 수 있지만 어차피 반박 당할 것 같은 기분이어서였다.

“뭐, 원래는 훈수 정도만 두러 온 거지만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너희보다 훨씬 열악한 상황에서 게임을 완성했거든. 우린 부실도 없어서 컴퓨터실에서 회의하고 프린트도 없어서 노트에다 기획서를 그리면서 작업했다. 그래픽 담당? 그런 건 있지도 않고. 인간적으로 우리가 너희 같은 환경이었으면 익스트림 발리볼보다 훨씬 더 규모 있는 게임을 만들었을 거야.”

“그럼 저희도 규모 있는 게임을···”

“우린 경험이 있잖니. 너희는 없고. 1년 후면 졸업 아냐? 1학기 중간고사도 끝났으니 남은 시간은 더 적을 거고. 정말로 3년 동안 아무 게임도 못 만들고 졸업하고 싶어?”

“그래도 여기 2년이나 투자했는데 의미 있는 결과물을 내고 싶어요. 그럴게 아니면 의미가 없어요!”

“투자? 투자아아?”

혁찬의 말이 상혁의 심기를 거슬리게 만들었다. 눈앞의 녀석은 대체 뭘 투자했다고 하는 걸까.

“전날 게임하고 ‘이 게임 해보니까 재미있더라! 우리도 이런 거 만들어보자!’ 라고 입 터는 게 투자야? 아니면, 원화가가 밤새서 그려온 캐릭터 보면서 ‘흠흠. 역시 내 아이디어로 나온 캐릭터는 훌륭하군.’ 하고 자기 만족하는 게 투자야? 지금 허공에다 팀원들이랑 니 시간 날려놓고 뭘 투자했다고 하는지 난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다.”

부실에 들어온 지 30분도 되지 않았는데 2년간 굴러간 팀 운영을 마치 눈으로 본 것처럼 묘사하는 상혁을 보며 수연은 속으로 생각했다.

‘뭐지? 왜 저렇게 우리 팀에 대해서 잘 알지?’

그녀의 그런 궁금증을 뒤로 하고, 상혁은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팀에서 네 역할이 없었다는 게 아냐. 넌 총대를 멨으니까. 팀원을 모은 것도, 게임 제작을 하자고 한 것도 너지?”

갑자기 자신을 인정하는 듯한 말투에 혁찬이 고개를 들어 상혁을 보았다.

“남들과 다르게 무언가 남는 것을 만들어보고 싶다라고 생각하고, 심지어 그 길에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는 일은 절대 쉬운 게 아니지. 넌 재능 있는 아이들을 잘 발굴했어. 이제 남은 건 게임을 만들기만 하면 되는 거지.”

“하지만···.”

대답을 주저하며 혁찬이 서연의 얼굴을 슬쩍 흘겨보자 상혁은 민준에게 눈짓했다.

“자, 잠깐 음료수라도 마실까? 근처에 카페 같은데 있니?”

상혁과 오래 호흡을 맞춘 민준은 그 눈빛의 의미를 바로 알아채고는 나머지 팀원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네. 안내해드릴까요?”

“응. 가면서 프로그래밍 이야기도 하고 싶으니까 둘만 남기고 가자.”

그렇게 이야기한 민준은 나머지 팀원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버렸고, 혁찬은 문이 닫히자 잠시 고민하더니 솔직한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았다.

사실 그것이 상혁의 노림수였다.

대부분 기획자란 인종은 자존심이 센 편이니까, 팀원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는 법이다.

“둘만 있으니까 편하게 털어놓을게요. 솔직히 말하면, 어디부터 손대야 할지 모르겠어요. 게임에 대한 아이디어는 마구 떠오르는데, 그 아이디어를 가지고 어떻게 해야 게임이 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상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같은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심지어 서점에서 책을 찾아보려고 해도 쓸만한 기획 관련 서적은 2000년대 넘어가야 나온다.

마음이 있어도 길이 없으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다.

그 사실을 잘 아는 상혁은 혁찬의 어깨를 두드리며 이야기했다.

“그건 이제부터 내가 가르쳐줄게. 어떻게 니 아이디어를 게임으로 만드는지, 공부는 어떻게 하는 것인지. 기획서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상혁은 자신이 익스트림 발리볼을 기획할 때 썼던 노트를 집어 혁찬에게 건넸다.

“우선 기획서 쓰는 방법부터 시작해 볼까?”

그렇게 그날부터 선문중학교 게임 제작 동아리는 갑자기 찾아온 두 명의 고등학생 형들에 의해 대격변을 맞이하게 되었다.

***

상혁과 민준이 이 일에 투자해도 괜찮다고 생각한 시간은 방학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2달 정도였고, 학생인 두 사람의 현재 신분을 감안하면 주말을 제외하고 지도가 가능한 시간은 극히 한정적이었다.

그렇기에 중학생 프로그래머인 민솔과 기획자 혁찬, 원화가 서연을 포함하여 총 5명은 최대한 시간을 쪼개서 빡빡하게 일정을 진행해야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중학교의 수업 종료 시간이 고등학교보다는 빨랐기에, 조금 시간이 지나자 5명은 주로 선문 고등학교에 현주가 마련해준 게임 동아리 부실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물론 처음에는 고등학생들이 바글바글한 학교에 발을 들여놓는 것에 대해서 조금의 두려움이 있었던 3명이지만, 그 두려움은 다른 형 누나들을 만나며 순식간에 사라졌다.

“너희가 상혁이랑 민준이한테 게임 제작 배우는 중학생이라며? 게임 다 되면 나도 꼭 시켜줘야 돼?”

학교 안에서 상혁과 민준은 그들이 아는 것 이상으로 유명인이었고 대부분의 친구들은 두 사람이 만들 차기작에 매우 기대를 하고 있었기에 중학교에서 왔다는 이 3명에게도 매우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덕분에 3달이 지난 지금 3사람은 완전히 고등학교 분위기에 적응하여 편안히 두 학교를 왕래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3명중 가장 큰 변화를 보인 건, 의외로 두 사람의 개입에 가장 거부감을 느끼던 혁찬이었다.

“선배. 지금 개발 중인 부분에서 이 이벤트를 추가하고 싶은데요?”

“어디 보자···. 흠··· 분량이 꽤 되는데? 체험판 분량을 감안하면 너무 무거워지는 거 아냐?”

“그래도 세계관 전달을 위해서는 이 부분이 들어가야 원활할 것 같아요.”

“그 말은 이게 지금 무조건 봐야하는 공통 이벤트라는 건데, 멀티엔딩 식 비쥬얼 노블에서 공통 루트는 너무 길면 안 좋아. 매 캐릭 공략할 때마다 반복해서 봐야 하거든.”

“흠···. 그럼 한번 압축해볼게요.”

“그래. 게임 시나리오는···.”

“게임 장르의 형식에 맞춰서 쓴다. 안 잊었어요.”

상혁은 혁찬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고는 기획서로 시선을 돌렸다.

비록 2년간 아무것도 진행하지 못한 채로 시간을 날려먹은 팀장이긴 했지만, 상혁이 보기에 혁찬은 충분히 좋은 기획자가 될 재능이 있는 녀석이었다.

‘배우는 속도도 빠르고, 한번 이야기한건 제대로 숙달될 때까지 연습하는 타입인 것 같네.’

가끔 그런 사람들이 있다.

무언가를 계기로 삼아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사람들이.

그리고 혁찬은 상혁이 보기에 그런 타입의 인간이었다.

물론 배운지 두 달밖에 안 되었기에 100% 쓸만한 기획자가 되었다고 하기는 어렵고, 기획서는 빈틈 투성이에 시나리오 양식은 조잡했지만, 혁찬은 유저가 매력적으로 느낄 수 있는 컨셉트를 잡을 수 있는 능력이 매우 좋았다.

단순히 잡은 설정만 들어도 재미있을 것 같은 컨셉을 잡는 능력.

어쩌면 서연이 2년이나 줄곧 시간을 날리면서도 게임 제작 동아리를 그만두지 않은 건, 혁찬이 가진 그런 재능 때문일지도 몰랐다.

상혁의 가이드를 통해서, 혁찬은 팀을 통해 만들 게임을 SRPG 장르에서 비쥬얼 노블로 선회했다.

애당초 팀 내에서 가장 실력있는 인원이 원화가인 이상 원화를 살리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견해를 따른 것이다.

결국 3사람이 만드는 장르는 비쥬얼 노블로 결정되었다.

우선 프로그래밍의 부담이 크지 않기에 아직 경험이 적은 민솔도 부담 없이 제작할 수 있으며, 혁찬이 가진 재능을 살릴 수도 있으면서, 원화가의 비교적 높은 실력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장르.

특히 원화 분야를 담당하고 있는 서연이 보여주는 능력은 거의 경이적이었는데, 서연은 거의 웬만한 프로 수준의 작업속도과 퀄리티를 보여주고 있었다.

“오빠, 여기 작업물이요.”

“매번 말하지만 너 그렇게 빠르게 작업할 필요 없다니까? 좀 쉬면서 하는 건 어때?”

“전 지금 그림 그리는 게 쉬는 거예요. 그리고 요즘 즐거워서 미치겠는걸요?”

서연이 넘긴 CD를 상혁은 민솔에게 다시 넘겨주었다.

그러자 민솔은 안에 있는 데이터를 꺼내 현재 개발 중인 게임 안에 집어넣고 실행을 클릭했다.

어제 버전까지만 해도 임시 리소스로 들어가 있던 이미지들이 새로 교체되면서, 게임은 정말로 팔리는 게임처럼 그럴싸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미 필요한 부분의 시나리오와 스크립트 작업은 다 마무리 된 상태였기에 단순히 임시 이미지를 완성된 리소스로 교체하는 것만으로도 게임의 개발 진도가 확 진척된 느낌이 된다.

말 그대로, 게임이 완성되어가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2년 동안 주구장창 그림을 그렸음에도 아무것도 진행이 되지 않아 갑갑해 하던 서연에게는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괜찮은데?”

어느새 옆에 다가온 민준이 툭하고 감상을 던져놓자 서연이 기뻐하며 물었다.

“정말요?”

“응. 괜찮은 느낌이야.”

상혁도 민준의 의견에 동의하고 있었다.

처음에 게임 장르를 비쥬얼 노블로 결정하고 나서, 혁찬이 기획을 들고 왔을 때만 해도 돌 아이 같은 기획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은근 슬쩍 사람을 자극하는 매력이 있었다.

“무협이랑 스팀펑크가 이렇게 잘 어울릴 줄은 상상도 못했다.”

게임 화면에서는 증기를 뿜어내는 대검을 들고 서로 싸우는 캐릭터들의 모습이 멋진 일러스트로 표현되어 있었다.

작업은 순조롭다.

그리고 상혁은 지금 자신들의 지도로 이 중학생들이 만들어가는 결과물에 꽤 괜찮은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마도 생소하지만 독특한 컨셉으로, 묘한 매력을 가진 게임이 될 것이다.

체험판 완성을 앞둔 현재 시점에서, 상혁의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배포문제.

‘익스트림 발리볼’이야 처음부터 그 부분을 고려해서 저퀄리티의 디스켓 한 장짜리 용량 게임으로 제작했지만, 장르가 비주얼 노블이면 이야기가 다르다.

현재 혁찬 일행이 만들고 있는 ‘기공 무림전’의 경우 체험판 용량이 15mb에 육박하는데, 가장 용량을 차지하는 음성더빙이 빠진 상태로 이정도 용량이면 꽤 큰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마도 일반적인 PC통신 속도로 다운로드 받으려면 하루 종일 걸릴지도 모른다.

‘이 시대에 스팀이 있으면 한방인데···’

개발자가 자유롭게 게임을 올리고 베타를 배포하고 사전 판매가 가능한 오픈마켓 플랫폼이 이 시대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 상혁은 못내 아쉬웠다.

“선배님, 뭘 그리 고민하세요? 게임에 문제라도 있어요?”

그때 혁찬이 상혁에게 물었고 상혁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게임은 괜찮아. 짧은 기간인데 우리 예상보다 너희가 훨씬 잘 따라와 줬고, 너희들은 재능도 있으니까.”

“그럼 뭐가 걱정이에요?”

“너희 재능을 살릴 수 있는 장르로 만든 건 좋았는데 용량이 커지니까 체험판 배포 수단이 마땅치가 않네.”

“아, 그거요? 그거는 게임 잡지에 광고 올리려고 했는데요?”

“돈 들잖아.”

“저희 집 돈 많아요.”

상혁은 혁찬의 말을 듣자마자 고개를 푹 숙이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이 부르쥬아 새끼! 부들부들부들!”

상혁이 오랜만에 입으로 ‘부들부들’소리를 내자 혁찬은 머리를 긁으며 씨익 웃었다.

“헤헤···.”

상대방이 싫어한다고 어쩌겠는가, 태어난 걸 그렇게 태어났는데.

겸연쩍게 웃는 혁찬의 아버지는 무려 중견기업 사장의 아들이었고, 상혁은 그런 혁찬을 보며 금수저와 흙수저의 메꿀 수 없는 격차에 대해 속으로 한탄했다.

그리고는 벽에 꽂힌 게임 잡지를 몇권 꺼내며 혁찬에게 던졌다.

“그럼 어디 광고 낼지 한번 니가 골라봐.”

대부분의 게임 잡지가 온라인으로 플랫폼을 옮긴 2020년과는 다르게 1998년에는 꽤 여러권의 게임잡지가 있었고 다른 계열의 잡지와 마찬가지로 각 잡지마다 메인 독자층의 구성이 달랐다.

상혁은 혁찬에게 그중 어떤 잡지가 자신이 만드는 게임의 홍보에 가장 도움이 될지를 고르라고 한 것이었다.

혁찬은 잡지들을 이리 저리 살펴보더니 한권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상혁은 혁찬이 고른 잡지를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주로 일본 게임들의 공략이나 정보들을 메인으로 하는 잡지, ‘PC 동호인’ 이었다.